덕수이씨종보 영인본 간행

대종회에서는 종회창립 50주년을 기념하..

   
 
 

제목
德水李氏 略史
德水李氏 略史
1. 관향(貫鄕) : 덕수(德水)
덕수는 개성시 판문군 중면 덕수리인데 개성 부근으로 서울과 거리는 179리이다.
고구려 시절 덕물현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2년 덕수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충선왕 2년 해풍군에 속하였다가 조선 세종 24년 풍덕군이 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개성군과 합쳐졌다가, 1930년 개성이 부로 승격되면서 개풍군이 되었다. 해방 후 남북이 갈리면서 1953년 휴전협정으로 북한에 귀속되었다.

시조(始祖) : 이돈수(李敦守)
덕수이씨는 고려 중기 무인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덕수현에서 태동(胎動)하였다.
시조는 고려 신호위 중랑장 이돈수이며 그 선계(先系)는 알지 못한다.
아들 양준(陽俊)이 신호군 중랑장 보승장군을 역임하고 1243년 별세후 은청광록대부 상장군에 증직되었으며, 손자 소(劭)는 지삼사사를 역임하고 1282년 별세 후 금자광록대부 상장군 판예부사에 증직되었다.
증손자 윤운(允蒀)이 판도판서 상호군을 역임하고 1334년 별세한 후 첨의정승 감춘추 관사에 증직되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면서 후손들이 관향을 덕수로 하고 이돈수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가문의 영광
덕수이씨는 영의정 3명, 좌의정 4명, 대제학 6명, 공신 5명, 공훈 10명, 청백리 6명, 시호 25명, 봉군 16명, 불천지위 7명, 정려 충신 4명, 효자 14명, 효부 12명, 열부 5명, 서원,향사 배향 14명, 문과급제 고려조 2명, 조선조 107명, 무과급제 423명, 건국훈장 포상 17명이 배출되었다.
4세 첨의공 윤운(允蒀)이 1249년 출생하여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1334년 86세로 별세한 후 첨위정승 덕수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도사공 윤번(允蕃)은 1265년 출생하여 1309년 문과 급제 후 도사를 역임하였다.
5세 양간공 천선(千善)은 1360년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이 되고 낙안백(樂安伯)에 봉 해젔으며, 양간(良簡)이라 증시되었다. 1392년 조선조에 들어와 7세 집의공 모는 문과 급제 후 집의를 지냈고, 춘당공 양(揚)은 고려조에서 사마시에 급제한 후 조선조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태종 즉위전 동갑계원으로 정난에 참여하였고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1447년 81세에 별세한 후 종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삼종인 정정공 변(邊)이 대과 급제 후 대제학,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중추부사에 올라 사역원 도제조를 지낸 후 1473년 83세로 별세하는 등 지위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반열(班列)에 올랐다.
덕수이씨는 중종-영조대 300여 년간 문무를 겸비한 가문으로 성세를 보였는데 10세 연헌공 의무(宜茂), 참의공 거(琚)등 10여명이 대과에 급제하고 해풍군 함(菡), 하원군 심 형제가 공신이 되고 기묘명현 풍암공 백록(百祿), 수사공 울(菀)등 이름난 학자와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연이어 나오면서 문벌(門閥)이 되었다.

그 후 도학에 사림정치의 이상을 구현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태두 율곡공 이(珥), 무열에 임진왜란을 맞아 존망지추의 위난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성웅 충무공 순신(舜臣)이 전후하여 나오고, 동방시성(東方詩聖) 동악공 안눌(安訥) 한문사대가 택당공 식(植)등이 가성을 빛내어 명문의 토대를 튼튼히 하였다.
그 후 16세 외재공 단하(端夏) 좌의정, 정익공 광하(光夏) 한성판윤, 17세 수곡공 여(畬) 영의정, 취촌공 집 좌의정, 18세 목곡공 기진(箕鎭), 탄옹공 주진(周鎭) 이조판서, 19세 첨재공 은(溵) 좌의정, 20세 정수재 병모(秉模)영의정 등 뛰어난 학자와 상경(相卿)에 오르는 사람이 많이 나오니 정조대왕의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아국망족선수 덕수지이(我國望族先數 德水之李)”라 하였다.
무열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많아 423명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무공 순신(舜臣), 강민공 완(莞), 충민공 봉상(鳳祥), 충숙공 홍무(弘茂)가 충신으로 정려되었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충무공이 보임된 후 직계 후손에서 충민공 봉상(鳳祥)등 12명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국의 바다를 지켰다.
조선조 말엽에는 19세 유수(惟秀), 20세 익모(翊模), 21세 노춘(魯春), 노익(魯益), 노병(魯秉), 원희(元熙), 용희(容熙), 22세 규석(奎奭) 등이 판서로, 21세 복희(宓熙), 22세 규안(奎顔) 등이 판윤으로, 20세 승권(升權), 항권(恒權)이 통제사를 역임하는 등 문무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가성(家聲)을 이었다.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 36년 식민치하에서는 단 한명의 매국인사도 없었으며 실곡공 필희(弼熙), 우풍공 규풍(奎豊), 괴은공 춘영(春永) 등 17명이 항일운동을 주도한 공으로 국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특이한 사항 몇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0세 풍성군 의번(蕃)의 삼남 해풍군 함(菡), 사남 하원군 심 형제가 중종반정 시 유공 으로 병충분의 정국공신이 되어 부친도 풍성군에 추증되었다.

10세 연헌공 의무(宜茂)는 대과에 급제하고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현달하였으니 장남 권(卷)은 절도사, 차남 기는 영의정 덕풍부원군, 삼남 행(荇)은 좌의정, 사남 령(苓)은 군수, 막내 미(薇)는 판서를 지냈다.

12세 충무공 순신(舜臣)은 덕연군 정(貞)의 삼남으로 출생하여 여러 관직을 거처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 중 순국하여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에 봉해졌고 현충사등 20개 향사, 사우에 배향되었고, 매년 국가, 해군 ,지방자치단체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

13세 율곡공 이(珥)는 감찰공 원수(元秀)와 신사임당의 삼남으로 태어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대동법과 사창의 실시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율곡은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철인이요, 도학자였으며, 정론가요, 교육자이자 경세가(經世家)이다.
이조판서, 우찬성을 역임하고 별세하니 청백리에 녹선되고 종묘(선조실), 문묘, 자운서원 등 30개소의 서원에 배향되었고 파주시청 및 강릉시청 주관해 매년 추모제를 올린다.
아우인 옥산공 우(瑀)는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 서, 화, 금에 능하여 사절(四絶)로 불리었다.
13세 순천공 통(通)은 1603년 순천 등 4개 군읍을 맡아 다스리면서 치적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장남 경안(景顔) 정언, 차남 경민(景閔) 출계하여 증 좌의정, 삼남 경용(景容) 전라감사, 사남 경헌(景憲) 병조판서, 막내 경증(景曾) 이조판서로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영현의 벼슬에 올랐다.

14세 동악공 안눌(安訥)은 양관 제학, 예조판서를 역임했고 아들 대산공 합(柙) 대사간, 장손 정익공 광하(光夏) 한성 판윤, 취촌공 집 좌의정, 탄옹공 주진(周鎭) 이조판서, 첨재공 은(溵) 좌의정까지 6대를 장남으로 이어오면서 문과에 급제하고 정1품 2명, 종1품 2명, 정2품 1명, 정3품 1명을 배출하여 대를 이여 현달하였다.

15세 택당공 식(植)은 이조판서, 4전문형을 역임했고, 삼남 외재공 단하(端夏) 좌의정, 손자 수곡공 여(畬) 영의정까지 3대가 대제학을 지냈고, 5대손인 정수재 병모(秉模)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특히 택당공의 고조부 행(荇), 택당공 식(植), 삼남 단하(端夏)등 3명은 정2품으로 보임하는 양관 대제학에 정3품에서 임명되었으니 문명(文名)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부모에 효도한 사람도 많아 효자, 효부, 열부로 정려된 사람이 31명이며, 이효증직(以孝贈職)된 사람이 11명인데 특히 12세 청곡공 학수(鶴壽) 및 직계후손 장죽공 탱(樘), 종윤(宗胤)의 배위 관성전씨, 참판공 정철(廷喆), 행당공 복초(復初), 배위 구례장씨, 월주공 만춘(萬春), 인암공 채(埰)가 부모에 효하여 정려받아, 6대 8효(六代八孝)하여 나라에서 1764년 충북 영동군 원당리에 정려각을 세웠다.

구휼(救恤) 부문에서 13세 부계공 서(漵)는 탄옹공 주진(周鎭)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여, 1776년 대구판관 재임 시 홍수로 시가지가 침수되어 주민피해가 극심한 것을 보고 사재(私財)를 들여 신천을 축조하여 주민의 안녕을 도모하니, 그 제방 이름을 이공제(李公堤)라 명하고 부계공원에 공덕비를 세웠으며 매년 1월 15일 대구시 주관으로 추모제를 올린다.

상주인구 현황은 2000년 인구조사 결과 가구수가 15,711가구이며, 50,486명이 살고 있어 인구 순위는 137위이며 점유비는 0.10978%이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대종회 홈페이지(www.deoksoolee.or.kr) 또는 문정공 종회 홈페이지(www.덕수이씨.kr)의 덕수인명록(德水人名錄)을 참조바람.

보책(譜冊)의 간행
15세 택당공 식(植)이 고조 용재공 년보와 율곡공 가전세계를 참고하여 중랑장 이돈수를 시조(始祖)로 하는 세계(世系)를 확립하고 13분 직계선조의 세계열전(世系列傳)을 지었고, 삼남 외재공 단하(端夏)는 10분 선조의 방친열전(傍親列傳)을 지었고 판윤공 광하(光夏)의 세고(世稿)와 합본하였다.
그후 1712년 17세 수곡공 여가 영의정 재임 시 보사를 이끌고 16세 참판공 희무 (喜茂), 감사공 탄(坦) 부자(父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713년 최초로 세보(壬辰譜)를 간행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세보를 다시 만들어, 2001년 7월에 9간 세보(辛巳譜) 및 증보 세계열전을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1986년 종보(宗報)를 창간하여 계간(季刊)으로 발행, 종인에게 공급하고 있으며, 2005년 10월 1일 소종회 홈페이지의 대종회사항을 한데 모아 대종회홈페이지를 개설하였으며, 2006년 10월 5일 선조의 유적을 수록한 덕수이씨 800년사를 간행하였다.

종회활동
1959년 4월 26일 대종회(大宗會)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별 지부(支部)와 소파별로 소파종회(小派宗會)가 조직되어있다.
대종회 사무소 : 서울 종로구 창신동 197-7번지 삼미빌딩 4층
전 화 : 02-3675-1122, 팩 스 : 02-3675-1128
홈 페이지 : http://www.deoksoolee.or.kr
소종회홈페이지
승지공종회 : http://www.duksoolee.or.kr
정재공종회 : http://www.duksoolee.com
문정공종회 : http://www.덕수이씨.kr/
http://blog.naver.com/munjunggong/
충무공종회 :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미주 종회 : http://www.duksooleeusa.com/


집성촌
개성 판문군 중 면 덕수리
경기 파주시 파평면 일원
성남시 고등동 일원
양평군 양동면 일원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강원 정선군 임계면 일원
충북 영동군 양산면 원당리
충남 당진군 송산면 일원
아산시 음봉면 일원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
경남 거창군 주상면 완대리

德水李氏의 연원(淵源)
세계와 열전 제사(題辭)의 상이(相異)를 고증함
외재(端夏) 지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말년에 우리 덕수이씨의 종계분파도(宗系分派圖)를 만들고 또한 세계와 열전을 손수 초 하시고는 그 제사(題辭)에 이렇게 적었다.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보첩이 조금씩 다르다. 나의 고조부이신 용재(荇)선생이 손수 작성한 세계연보에는 추밀공 양준(陽俊)을 시조로 삼았으나 그 출처는 밝히지 않았는데, 율곡(珥)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에는 중랑장 돈수(敦守)를 시조로 삼고, 추밀공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충무공댁에 전하는 세계에는 신라 사람 이허겸(李許謙)의 후예라고 했으나, 그 중간의 세계는 밝히지 않은 채 역시 추밀공(陽俊)을 시조로 삼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이씨는 신라 6부에 사성한 것이 효시이니 지금의 경주 지방의 이름난 가문이 그 시초이다. 신라사람 허겸(許謙)의 후예라고 함은 6부의 첫째 성씨인 이씨를 가리킨 듯하나, 다른 고증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이제 율곡선생 댁에 전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중랑장(敦守)을 시조로 하여 세계도를 만들고, 용재공(荇)께서 작성한 연보에 의거하여 추밀공(樞密公)에서 시작하여 열전을 만든다.

선친께서 이 열전을 초하고 원고를 바꾸어 다시 쓰셨으나 교정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까닭에 벼슬을 지낸 차례나 년월에 불충분한 점이 있으므로 불초(端夏)가 삼가 년보와 초고(草稿)를 근거로 서로 차이가 나는 곳을 고증하여 그 뒤에 붙였는데, 30년 후에 충무공의 종손(從孫)인 지강(之綱)이 이 열전을 보고 단하(端夏)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하기를, “이허겸(李許謙) 운운하는 이야기는 우리 집 선대로부터 들은 바 없을 뿐더러, ‘동국여지승람’을 상고하면 이허겸(李許謙)은 본관이 인주(인천) 사람으로 그 조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이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그 13세손 때인 고려조에 크게 출세했고, 그의 8대손 화(和)가 비로소 조선조에 들어왔다” 고 했으니 그가 보승장군의 선대(先代)가 아님이 명백하다. 지강(之綱)씨는 70세가 넘은 데다 학식도 있었으며, 그 일가들이 아산에 같이 사는데 그 집안에는 대대로 이러한 전설이 없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상고해도 이것이 사실인즉, 단하(端夏)는 선친(植)께서 어디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지 못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고 단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먼 일가인 지정(之貞)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자, 지정(之貞)은 “우리 집에 대대로 이런 말이 과연 있었다.”고 말하기에 단하는 그런 사실의 근거를 얻어 보기를 원했다. 지정이 돌아가서 그 선대의 가첩(家牒)을 상고해 보니, “이허겸은 대광보국으로 신라 사람이며 그 3,4대손 양준(陽俊)이 보승장군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는데 본가의 자손들도 가첩에 있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살펴 보건대 보승장군이 몽고에 사신으로 간 사실은「고려사」에 보이므로 나는 이미 본전(本傳)의 밑에 채록했으나, 이허겸은 여지승람에 실려 있는바 성관(姓貫)이 스스로 구별되니 지정의 가첩에 기록된 것은 잘못 들은 데서 나온 듯하다. 지정은 정정공(邊)의 9대손이 되는 서출로서 역시 유학을 업으로 했다. 정정공은 충무공(舜臣)의 5대조이시며 지정의 선대와는 같은 파이니 충무공 집안의 가전이라고 일컬어진 것도 지정의 가첩에 근거를 둔 것 같다.
이제 서로의 차이점을 고증한 것이 이와 같으나 열전의 제사(題辭) 중에 감히 그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간행했으며, 또한 충무공 이하는 고증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77字를 지금 우선 삭제하고 그 사유를 집에 간직된 본고(本稿)의 뒤에 기록하여 뒷날 자손이나 종인들이 다시 다른 증거를 상고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게 하는 바이다.

출처 : 덕수이씨 세계열전에서

始祖 이야기
자료 : http://san114.tistory.com/2365
덕수(德水)는 경기도 개풍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이다. 덕수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때 신호위중랑장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고종 5년(1218년) 거란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 거란을 격파하였다고 ‘신유보(辛酉譜)’에 전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제15권 고종 5년(1218년) 9월조에 보면 “조충(趙沖) 등이 장단을 통하여 동주(황해도 서흥)로 향하다가 거란군을 동곡(東谷)에서 만나, 모극(毛克)ㆍ고연(高延)ㆍ천호(千戶ㆍ직명) 아로(阿老)를 사로잡고, 성주(평남 성천)로 가서 각 도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 안찰사 이적(李勣)이 병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을 만나서 전진하지 못하자 장군 이돈수(李敦守)ㆍ김계봉(金季鳳)을 파견하여 이들 적군을 치고 이적(李勣)을 맞이하려 했으나, 적군은 이미 두 길로 나뉘어서 곧바로 우리 중군을 공격해 왔다. 이에 아군이 좌우익진을 펴서 북을 울리며 전진하니 적군은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서 도망갔으므로 이돈수(李敦守)등은 이적과 만났다.…”는 기록에서 이돈수(李敦守)의 이름이 나타난다. ▲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5년(1218년) 9월조에 이름이 기록된 덕수이씨 시조 이돈수(李敦守).덕수이씨의 시조를 이돈수(李敦守)로 쓴 것은 ‘율곡가전세계’에서 비롯되어 ‘택당수초종보’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이전에는 용재 이행(李荇ㆍ1478~1534)이 손수 초한 ‘용재수초세계연보’나 ‘충무공가승’에 이돈수의 아들 이양준(李陽俊)을 시조로 하고 있었다. 이양준(李陽俊ㆍ1202~1243)은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29년(1242년) 5월조에 “시랑 송언기(宋彦琦)와 중랑장 이양준(李陽俊)을 몽고에 파견하였다”고 했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그는 조산대부로 흥위위 보승장군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로 동지추밀원사ㆍ어사대부ㆍ이부상서 등에 추증되었다. ▲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29년(1242년) 5월조에 처음으로 이름이 나타나는 이양준(李陽俊).택당 이식(李植ㆍ1584∼1647)은 덕수이씨의 종계분파도를 만들고 또한 세계와 열전을 손수 초한 ‘택당수초종보’ 첫머리에,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보첩이 조금씩 다르다. 나의 고조부이신 용재 이행(李荇)이 손수 작성한 세계연보에는 추밀공 양준(陽俊)을 시조로 삼았으나 그 출처는 밝히지 않았으나, 율곡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에는 중랑장 돈수(敦守)를 시조로 삼고, 추밀공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택당수초종보’에서 택당 이식(李植)은, “…또 충무공댁에 전하는 세계에는 신라 사람 이허겸(李許謙)의 후예라고 했으나, 그 중간의 세계는 밝히지 않은 채 또한 추밀공(이양준)을 시조로 삼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이씨는 신라 6부에 사성한 것이 그 비롯함이니 지금의 경주 지방의 이름 높은 가문이 그 시초이다. 신라사람 허겸(許謙)의 후예라고 함은 6부의 첫째 성씨인 이씨를 가리킨 듯하나, 다른 증명할 만한 뒷받침이 없으므로, 이제 율곡선생 댁에 전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중랑장(이돈수)을 시조로 하여 세계도를 만들고, 용재공(이행)께서 작성한 연보에 의거하여 추밀공(樞密公)으로부터 시작하여 열전을 만든다.”고 기록하였다. 택당 이식(李植)이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인 이허겸(李許謙)을 신라계 이씨로 기록한 것을 보면 인천이씨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다. 그가 41세 때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 3등에 녹훈되고 인원군에 봉해진 양졸정 이휴복(李休復ㆍ1568∼1624)이 인천이씨였고, 그의 고조부인 용재 이행(李荇) 등이 왕명으로 중종 25년(1530년)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허겸(李許謙)은 본관이 인주(인천의 옛 이름)라는 것과 인천이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도 …. 
택당 이식(李植)은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하는 덕수이씨 세계를 창시하고 2세 이양준(李陽俊)부터 13분 직계 선조의 세계열전을 지었으나, 교정은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들인 외재 이단하(李端夏ㆍ1625∼1689)가 연보와 초고를 근거로 하여 수정ㆍ편집하고 10분 선조의 방친열전을 지어 합본하였다. 그런데 후일 충무공의 종손(從孫)인 이지강(李之綱)이 이 열전을 보고 이단하(李端夏)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허겸(李許謙) 운운하는 말씀은 우리 집 선대로부터 들은 바가 없을뿐더러, ‘동국여지승람’을 상고하면 이허겸(李許謙)은 본관이 인주(인천의 옛 이름) 사람으로서 그의 조상 허기(許奇))는 당나라에 들어가 이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그 13세손 때에 고려조에 크게 출세했고, 그의 8대손 화(和)가 비로소 조선조에 들어왔다.”고 했다. 이단하(李端夏)는 이지강(李之綱)이 70세가 넘은 데다 학식도 있었으며, 그 일가들이 충남 아산에 같이 사는데 그 집안에는 대대로 이러한 전설이 없다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상고해도 이것이 사실이었다. 이단하(李端夏)는 아버지 이식(李植)이 어디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지 못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고 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먼 일가인 이지정(李之貞)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에 이지정(李之貞)은 “우리 집에 대대로 이런 말이 과연 있었다.”고 말하기에 이단하는 그런 사실의 근거를 얻어 보기를 원했다. 이지정이 돌아가서 그 선대의 가첩을 상고해 보니, “이허겸은 대광보국으로 신라 사람이며 그 3, 4대손 이양준(李陽俊)이 보승장군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는데 본가의 자손들도 가첩에 있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단하(李端夏)는 아버지 이식(李植)이 충무공 집안의 가전이라고 일컬어진 것도 이지정의 가첩에 근거를 둔 것 같았고, 이지정의 가첩에 기록된 것은 잘못 들은 데서 나온듯하여 그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후 숙종38년(1713년) 최초의 덕수이씨 세보인 임진보(壬辰譜)가 간행되면서 시조 및 세계가 확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첨부파일
 

德水李氏歲享祝
문중별 삼도수군통제사 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