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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忠武 諡號를 받으신 12人
1)조영무 [趙英茂]

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趙之壽)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순후(趙珣厚)이고, 아버지는 조세진(趙世珍)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趙仁沃)과 개국공신 2등 조온(趙溫)이 그 당내이다. 그들의 출세에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시호 충무(忠武)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정몽주(鄭夢周)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후 문하부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三軍府參判事) 때,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2)이준
[李浚]

1441(세종 23)∼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종실.
내용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 구(臨瀛大君璆)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龜城正)에 봉해지고 이어 구성윤(龜城尹)으로 봉해졌다. 1463년에 구성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기 때문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나이 27세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에 임명되어 이를 토평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훈봉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어 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5월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훈봉되었다. 이듬해에 아버지 임영대군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직을 내어놓았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로 귀양갔으나, 왕족이었으므로 가산을 적몰당하지는 않았으며 나라에서 곡식을 지급하였다. 귀양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米豆)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김수항(金壽恒)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3)남이 [南怡, 1441 ~ 1468]
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世祖)에게 남이(南怡)는 고종사촌의 아들인 셈이다.남이는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권람(權擥)의 딸과 결혼하여 남구을금(南求乙金)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했고,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다시 혼인했다. 그러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하여 1468년(세조 14)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 받았다.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 젊은 종친(宗親)들을 중용하여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다. 남이는 세조가 1460년(세조 6)에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庚辰武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김용달(金用達)과 함께 포천(抱川), 영평(永平)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했고,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都摠使)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했다.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行 副護軍)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行 護軍)이 되어 종성(鍾城)에 주둔하며 온성(穩城), 경원(慶原), 경흥(慶興)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포상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가 되었다. 이어 명의 요동군(遼東軍)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윤필상(尹弼商)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1468년(세조 14) 음력 5월에 서현정(序賢亭)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하였다가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다. 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했으며 8월에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韓繼禧)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에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해졌다.그러나 1468년(예종 1) 10월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의 고변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았고, 그해 음력 10월 27일에 강순, 변영수(卞永壽), 변자의(卞自義), 문효량(文孝良)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獄)’이라고 한다.남이는 1818년(순조 18) 음력 3월 10일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910년(순종 3)에는 '충무'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묘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4)김시민(1554~1592)
장군의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의 호를 받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5)김응하[金應河]
자 경의(景義), 시호 충무(忠武)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80년(선조 13) ~ 1619년(광해군 11) 무신
출신지 :철원(鐵原)
본관 :안동(安東)
관련사건 :후금정벌
대표관직(경력) :북우후
생애 및 활동사항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 김응하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裨將: 지방 사신을 따라다니던 관원)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6)구인후[具仁垕]
1578(선조 11)∼1658(효종 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증조는 능성군(綾城君) 구순(具淳), 할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아버지는 대사성 구성(具宬), 어머니는 별좌 정억령(鄭億齡)의 딸이다. 뒤에 구홍(具宖)에게 입양되었다. 인조의 외종형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1606년 선전관이 되고, 고원군수·갑산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정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의 반정 모의에 참여했다.
1621년 진도군수가 되었고, 1623년(인조 1)의 반정에는 미처 서울에 도달하지 못해 참여하지 못했으나,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반정 뒤 통제사·한성부윤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었다. 전라병사·포도대장을 거쳐 충청병사·수원방어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사 3,000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으며, 그 공으로 어영대장이 되었다.

전후로 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판의금부사 등을 겸임했으며,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 사건을 적발,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 말년에는 수 차례의 병조판서를 비롯해, 형조·공조의 판서와 수원부사·훈련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52년(효종 3) 판의금부사·홍청도병마절도사(洪淸道兵馬節度使)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65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처형당한 강씨(姜氏)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은 김홍욱(金弘郁)을 옹호하다가 삭직당했으나 곧 복관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공신인 동시에 인조의 외척으로서, 당시 공신들간의 대립이나 공신들과 일반 사류들 사이의 대립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별다른 기복 없이 정치적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7)정충신[鄭忠信]
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9대 손으로, 아버지는 금천군(錦川君)정윤(鄭綸)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인조(李仁祚)의 딸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그에게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 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으며, 이 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해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禭衣)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錦南集)』·『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8)이수일[李守一]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주부(主簿) 이오(李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자침(李自琛)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이난(李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이완(李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다음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 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園囿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高麗
1) 지용수[池龍壽]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생애 및 활동사항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으로 시작해 공민왕 때는 안우(安祐) 등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했으며, 홍건적에게 일시 함락된 서울(개경)을 수복해 1등공신이 되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러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해에 덕흥군(德興君)왕혜(王譓)가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되어 입국한다는 소식이 있자, 전공판서로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용주(龍州: 지금의 평안북도 용천)에 주둔했다가, 덕흥군이 물러간 뒤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지위가 차차 올라가 1365년에 밀직사·지도첨의상원수(知都僉議上元帥)가 되고 이듬해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이어 서북면상원수 겸 평양윤이 되었다.
1370년 원나라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원이 망하자 요심관리평장(遼瀋官吏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더불어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하였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기철(奇轍)을 죽인 것에 감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부원수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 임견미(林堅味),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격하였다.
이 때 시중 이인임(李仁任)은 도통사로 안주에 진을 치고 군사가 의주에 이르러 만호 정원비(鄭元庇)·최혁성(崔奕成)·김용진(金用珍) 등에게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게 해 모두 3일 만에 도하를 끝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동녕부를 회복하고 북원(北元)과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을 치르면서 성을 함락하고 창고를 거의 다 불태워 군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지름길로 갈 것을 청했으나 유독 혼자서 엄정한 군기를 자랑하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병사들이 크게 굶주려 소와 말을 잡아먹어 행군을 못하게 되자 모두가 원망해 지름길로 돌아왔다고 한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하성(河聲), 호는 월송(月松)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경주지씨의 시조인 원부(元夫)의 손자이자 중시조인 용도(龍圖)의 동생이다.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이 되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 침입 때 안우(安祐)를 도와 개경(開京) 탈환에 공을 세워, 이듬해 1등공신에 책록되고, 전객시판사 겸 서북면병마지사(典客寺判事兼西北面兵馬知事)가 되었다.

그해에 전공판서(典工判書)로서 서북면 도순무사(西北面都巡撫使)가 되어, 원(元)나라가 고려 왕에 임명한 덕흥군(德興君)이 거느리는 최유(崔濡)의 군사를 격퇴하고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에 책록되었다. 1365년 상원수(上元帥)를 거쳐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있으면서 왜구를 격파하였고, 1367년 서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1369년에는 평양윤(平壤尹)이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기새인티무르[賽因帖木兒]가 김백안(金伯顔) 등과 서북면에 침입하자 부원수 양백안(楊伯顔)·임견미(林堅味)·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압록강 밖으로 격퇴하고 동녕부(東寧府)를 회복하였으며, 북원(北元)과 국교를 단절하게 하였다.

2) 박병묵(朴炳黙)
박병묵(朴炳黙)은 나주에 토착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충무(忠武)라고 시호(諡號)되었다.

3) 최필달 [崔必達]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강릉최씨 충무공파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918년(태조 1)에 삼중대광 삼한벽상 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贊化功臣)에 훈봉되었다. 학문이 뛰어나고 교육을 통해 학문을 크게 일으켜 세워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려졌다. 벼슬은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강릉시 운정동(雲亭洞) 황산사(篁山祠)에서 매년 음력 3월 정일(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諡號順位:忠
1. 武 2.愍 3.壯 4.肅 5.翼 6.政 7.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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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별 삼도수군통제사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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