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종보 영인본 간행

대종회에서는 종회창립 50주년을 기념하..

   
 
 
구 분
행사
제 목
덕수이씨청장년회 제2차 선조유덕을 기리는 강연회 개최

2017년 10월21일(토) 오후 1시부터 서울특별시문래청소년수련관 대강당에서 덕수이씨청장년회 제2차 선조유덕을 기리는 강연회가 있었다. 이에 덕수이씨 대종회 이명렬회장, 덕수이씨 정정공, 풍암공종회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이충렬 대종회 총무이사, 이범 홍보이사, 이장열 부원군 춘당공 강평공 통합회장, 이종국 홍산공파 회장, 이수영 수사공파 회장, 이화열 정정공파종회 촘무이사 등과 종인 121명이 참석했다.



강연회에 앞서 방명을 하고


모두들 입장한 가운데


이재학 총무이사의 사회로 시작하였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이동하 청장념회 회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이장열 부원군 춘당공 강평공 통합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장학과 상패 수여식이 있었다.

 
하원군손 이이용(한국항공대학교 항공재료공학과 1학년)과


 

문정공손 이지원(서강대학교 사회과학부사회과학계 1학년) 에게 장학패와 장학금을 수여했다.


 수여식을 마치고 기념촬영

 

이어 김언수 서촌문화연구소 소장이 '
율곡선생의 10만 양병론의 진실'에 대하여 50분간 강의를 했다. 요약해보면

"조선은 건국되고 200년 동안 왜구나 여진의 간헐적인 침입은 있었으나 대규모의 외침이 없이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4대 사화, 정여립 반란사건 등 국내의 문제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율곡 이이는 국내외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경연에서 진언이나, 상소 등을 통하여 여러 가지의 국정개혁안을 선조임금에게 올렸다.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기 수년전 율곡은 경연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완급에 대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토붕(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진다)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진언 하였으나 유성룡 등 일부신하들의 반대와 선조의 유보적인 태도로 양병은 이루어지지 않아 임진란의 폐해가 더욱 막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그러나30,40여 년 전 부터 몇몇 사람들이 이를 부인하거나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양병론을 믿는 사람들은 근래 새로운 역사기록을 찾아 일일이 제시하여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논거가 자기모순이라는 것을 낱낱이 밝히고 있어 양측의 주장을 소개한다.

10만 양병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부인하는 논거는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0만 양병론은 선조실록에는 없고 선조수정실록에만 있다.

그 기록도 사관의 논평형식으로 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선조실록이 북인 편향적이고 왜곡이 심하다고 그 내용을 보완하여 선조수정실록을 작성하여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

 

둘째,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는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생각하면서 이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발언하였고,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 등에는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나오는데 중국고사에서 인용한 문정과 달리 문성은 율곡 사후 임금이 직접내린 시호다. 유성룡이 별세한 시기는 선조 40(1607)이고, 그로부터 17년 후인 1624(인조 2) ‘문성의 시호를 받았는데 유성룡이 어떻게 이런 사실을 미리알고 이문성은 정말 성인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이가원 교수는 <퇴도제자열전> 서애 유성룡 편에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서애 유성룡이 반대했다는 설은 어떤 사적에도 나타나지 않는 일이요, 다만 김장생이 지은 <율곡행장>중에 율곡이 일찍이 경연 중에 10만 양병설을 제창했으나 서애의 반대로 중지 되었으니 임란을 겪은 뒤에 서애는 이제 이르러보니 이문성은 참 성인이야.”라고 후회했다는 말이 삽입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율곡연보>계미 조 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있게 되었다. 또 율곡의 시()문성은 인조 2년 갑자 8월인바 서애가 졸()한지 17년 뒤가 된다. 어찌 이문성이라 운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율곡행장>이나 <율곡연보>는 자가 모순성을 드러난 것이다. ‘자체모순이라하였고(퇴계학보 제561975),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200978일자 한겨레신문 <주류역사학계를 쏘다>“(중략)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1607-1689)<율곡연보>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이이)은 정말 성인이다(眞成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이이가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인조2(1624)으로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재호 교수는 그의 <선조수정기사의 의점에 대한 변석-특히 이율곡의10만 양병론과 서애의 양병불가론에 대하여> <대동 문화 연구 1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5>라는 논문에서 <율곡행장>,<율곡시장>,<율곡연보>에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이문성(李文成)’이라고 칭했다고 전하는데 이 기록 자체가 세인의 의혹을 야기 시킨 첫 번째 사실이다. 나라에서 유성룡이 어떻게 생전에 이이를 지칭하면서 그이 자()숙헌(叔獻)’이나 그의 호인 율곡(栗谷)’이라고 일컫지 않고 죽은 지 17년 후에 내린 이이의 시호 문성(文成)을 미리 알고서 이문성(李文成)이라고 지칭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허구성을 즉시 판별할 수 있는 문제이다.“

 

셋째, 임진왜란당시 조선의 인구는 230만 정도로 10만 군사를 도저히 양성할 수 없다.

이재호 교수는 <선조수정실록 기사의 의점에 대한 변석>(대동문화연구1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5)에서 즉 이러한 상비군의 대병력을 양성하는 일에는 그만큼 국가재정의 부담이 증가하게 될 것이니 당시의 국력으로는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미래인력연구원 송복 이사장은 <서애 유성룡 만남> (지식마당 2007)에서 그 당시 인구는 230만 정도이고 인구 구성상 20,30세의 젊은이로 10만 군병을 도저히 채울 수 없고, 국가 세입 상 10만 양병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율곡의 10만의 군사를 양성하라는 내용은 율곡이 직접 쓴 글에 없어 믿을 수 없다 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율곡 10만 양병론의 실체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첫째, 선조실록은 북인들이 광해군 때 쓴 것으로 당파적 색깔이 짙어 자기 쪽 사람들은 한없이 추켜세워 조식이 죽었을 때는 학문은 산처럼 우뚝하고 바다처럼 깊고 넓었으며, 의표(몸가짐)는 서릿발 같이 깨끗하고 덕성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등 온갖 칭찬을 늘어놓았고 이황이 죽었을 때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 간단하게 기록 하였고,이이에 대하여는 부모에게 용납 받지 못하고 도망쳐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관직이 높아질수록 교만해지고 기량은 작은데다 책임이 무거웠으므로 때에 맞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고 자기 의견만 옳다고 하고 적임자가 아닌 자를 추천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팔았다. 죽었을 때도이조 판서 이이 졸()‘ 직 성명 빼면 오직 한 글자로 죽었다는 사실만 기록하였고. 대학자이고 정치가인 그의 업적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선조수정실록은 이황과 이이에 대하여는 대유로 추앙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국사편찬위원회는 1969년 발간한 <조선왕조실록 25범례>에서 선조실록은 광해군시대에 북인 기자헌, 이이첨 등이 주가 되어 편찬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는 간략하고, 이후의 기사는 조잡하여 역대 실록 중 가장 나쁘게 편찬 되었을(중략) 뿐만 아니라 당파관계로 무필(없는 일을 꾸며서 쓰는 것)을 가한 것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 하였다.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정세에 대한 의견과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조선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도 선조실록에는 없고 선조수정실록에만 있다.

선조실록을 편찬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국난에 대비하여 이이가 "10만 군사를 양성하라"는 경연에서 제안한 건의는 기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이의 10만 양병론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겠다.

둘째, 이항(李沆)의 시호 이문정(李文靖)과 율곡(栗谷)의 이문성(李文成)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이를 비유하여 한 말은 이문정은 정말 성인이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한 것이다. 서촌역사문화연구소장 김언수는 이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율곡전서원문을 직접 찾아서 확인하고 사본을 그의 저서 율곡 10만 양병론의 진실에 제시하고 있다.

: 이문정(李文靖)은 중국 송나라 진종 때의 이름난 재상으로, 시호가 문정인 이항을 가리킨다. 이항이 재상이 되고 왕단(王旦)이 참지정사(벼슬이름)가 되었을 때, 일찍이 이항이 왕단에게 변방이 무사하면 나이어린 진종이 사치 심을 일으키기 쉬우리라 걱정하면서 나는 늙어서 이를 보지 못하리니 이것이 추후에 참정(벼슬이름)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왕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항이 죽은 뒤에 진종은 과연 호화궁궐을 짓고, 간신을 등용하는 등 국정을 어지럽히자, 왕단이 이항의 선견지명을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문정은 정말 성인이다.“ 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송사 권 282, <이항열전>) 여기서는 유성룡이 율곡의 선견지명을 비유하여 한 말이다.

 

율곡 10만 양병론이 기록된 <율곡행장>,<율곡시장>,<율곡연보>가 영조20(1744),영조 25(1749) 간행되었을 때는 율곡전서는 모두 이문정은 정말 성인(李文靖眞成人也) 이라고 되어있다. 훗날 순조 18(1814) 새로 나오면서 이문정이 이문성으로 바뀌어 져 나온다.10만 양병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문성으로 된 후기 본 율곡전서의 내용을 보고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으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분들의 주장대로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은 정말 성인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가정하면 임진왜란은 1592년 일어났고, 후기 본율곡전서1814년에 간행되었으므로, 222년 후의(1814)잘못된 기록을 보고 마치 222년 전(1592)과거에 유성룡이 발언 한 것 같이 주장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 분의 주장은 기초적인 역사기록의 시대구분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아 틀린 자료를 근거로 주장을 하였으니 그 주장 또한 틀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0만 양병론과 율곡 시호 이문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현재 1740년대 영조 때 발간된 초기 본율곡전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고전번역원 등에는 없고,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만 비치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셋째,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인구는 230만 정도로 10만 군사를 도저히 양성할 수 없다. 는 것에 대하여.

이재호 교수는 <선조수정실록기사의 의점에 대한 변석>(대동 문화 연구 1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5)에서 즉 이러한 상비군의 대병력을 양성하는 일에는 그만큼 국가재정의 부담이 증가하게 될 것이니 당시의 국력으로는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래인력연구원 송복 이사장은<서애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에서 그 당시 인구는 230만 정도 이고 인구 구성상 20,30세의 젊은이로 10만의 군병을 도저히 채울 수 없고, 국가 세입 상 10만 양병은 불가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조선의 군사조직은 노비 등 천민을 제외한 16세부터 60세 까지의 양인을 대상으로 봉족제를 시행 3명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1명은 현역병으로 근무하고, 나머지 1명은 현역병의 농사를 지어주고, 다른 1명은 부역을 제공하는 등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세종시대의 정군 수는 95,000명이고, 성종실록에 기록된 성종 6년의 정군 수는 150,000명으로 되어있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중종 4년의 정군 수는 177,000명이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직접 언급한 선조실록(선조 25912, 10만 양병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신봉하는?) 을 보면 왕이 선유사로 전라 충청지역을 다녀온 윤승훈을 인견한 자리에서 중원(충청지역)의 군량을 믿을 수가 없다.10만의 군사가 두 서 너 달 먹을 양식을 마련하여 두어야한다. 급히 민간에서 추수할 때 거두어 모으거나 곡식을 사들어야 할 것으로 순전히 풍원(도체찰사 유성룡을 가리킴. 당시 안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량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좌상(윤두수)과 호판(이성중)이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또 중원 병세(전쟁 상황)는 멀리서 헤아릴 수 가 없는 데 만일 중지되면 어떻게 하겠는 가? 나의 뜻으로는 10만의 군사가 두 서 너 달 먹을 군량을 마련하여야 될 것으로 안다.” 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하였던 광해군은 무과시험 규정을 완화시켜 무사를 뽑는 다면 10만여 명의 정예 군사를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다.” 발언하고 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1619)923)

 

선조로부터 세 번째 임금인 효종도 정예한 포수(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중략)” <송자대전, 악대설화>하는 등 임금이 직접 10만 군사의 양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 세종, 성종 때의 명신으로 이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세조가 나의 제갈량 이라고 불렀던 눌재 양성지는 세조 7년의 인구를 400만 명이라 하였고, 10여 차례의 상소를 올려 정군 15만 명(경군 3, 지방군 12), 예비군 15만 명을 양성하라고 임금에게 건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종 32(1450) 115일 임금에게 올린 상소<비변10>에서 장정이 210만을 헤아린다고 하고 있다.500여전의 당시를 살아, 요즈음의 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와 기획재정부격인 호조 판서를 역임한 사람이 당시에 내린 견해와 판단이 진실일 수밖에 없으며 500여년 후를 살아가는 현재의 사람들이 아무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추론하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의 식견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호 교수, 송복 이사장의 주장은 역사 기록을 근거로 판단하면 실제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율곡은 직접 10만 양병론을 직접 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10만 양병론은 율곡이 직접 쓴 글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국가의 공식기록인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요즈음 같으면 장관급이상에게만 주었던 일종의 국가훈장 같은 것을 임금이 수여하는 <율곡시장>에도 기록된바 허위의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10만 양병론이 처음 나왔을 때는 유성룡이 전국의 장수를 거느리는 도체찰사를 겸한 일인 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 이었고,국방의 총책임자인 임금이 국방정책을 잘못하여 전쟁의 폐해가 막심하였다고 글을 써서 <율곡행장>을 발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10만 양병론이 처음 발표된 1597년은 임진왜란이 아직 끝나지 않아 정유재란으로 왜적이 대규모로 재침입한 해이다. 10만 양병론이 나오고 유성룡은 10년을 더 살았고, 선조도 11년을 더 살았는데도 양병론이 허위의 내용이라고 한 번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 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300여 년 동안 반대쪽의 당파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도 문제가 된 적이 없다.10만 양병론이 나온 후 불과 59년 후 효종 임금은 직접 그의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태평하던 시기에 10만의 군사를 양성하려고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며 오활(세상물정에 어둠)하다고 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밝은 식견에 승복하고 모두가 성인이라고 일컬었다. 참으로 근고에 없던 인재이다.”(효종실록 효종 7(1656) 126)라 하고 있으며. 숙종 때 병조판서 이사명(숙종 13926),숙종 때 좌의정 이여 (숙종 30129), 정조 때 훈련대장(현대의 대장급) 이주국(정조 20322)등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율곡의 10만 양병주장을 거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00여 년 동안 임금을 비롯한 우리의 선조들은 우매하고 정보가 없어서 10만 양병론을 믿어 왔을까? 양병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거는 율곡이 직접 글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는 사리에 맞지 않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논어도 공자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쓴 글이라 믿을 수 없을 까? 10만양병론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인권운동가이고 사상가였던 함석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장을 역임한 한영우 교수,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성신여대 전 이현희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장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이태진 교수, 한국군제사를 쓴 육군본부,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을 쓴 이이화,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를 쓴 전국역사교사모임, 조선을 움직인 사건 신병주 건국대교수, 조선의 힘 전주대 오항영 교수, 왕의 남자들의 신동준, 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등 수많은 교수들과 역사책을 쓰는 많은 사람들, 말없는 다수가 있다고 본다. 10만 양병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확실하게 알게 되면 과연 그 주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김현주(金賢珠) 선생이 '택당시의 사유(思惟)와 풍격(風格)'에 대하여 강연을 했다.
 

택당 시의 사유(思惟): 사물의 이치와 탐색 

澤堂集 15, 1, 「山菊花」, 12.

 

山菊世不數 들국화를 세상이 꼽지 않는 것은,

由來名品微 예로부터 명품이 아니어서 이네.

無心供采掇 무심히 정성스레 꺾어 모으니,

觸手暫芳菲 손대면 언뜻 향기롭네.

蘭蕙竟難恃 난초 혜초 끝내 믿기 어려워,

風霜空自威 바람서리 공연히 절로 위세를 떨치네.

徘徊幽澗底 깊은 산골 밑을 배회하여도,

似汝亦云稀 너 같은 이 또한 드물다 말하리

 

들국화와 시월의 국화에 나아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서 바람과 서리 속에서 자신의 향기를 풍기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그리고 그 이치를 궁구하여 주체의 ()를 극진히 하려고 하였다그것은 바로 절의이다
 

熟讀大學, 如掌內觀紋.”
대학숙독하여 마치 손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해야 한다. 

 

택당 시의 사유(思惟): 심성의 존양과 성찰

 

 澤堂集·續集 1, 「寺夜燒香」, 186187.

 

誰命心官宰此身 누가 심()이 신()주재케 했나?

寂然靈境大無垠 적연(寂然)한 신령스러운 경지 끝없이 크네.

中間些子幾微動 중간에 조금이라도 기미가 동()하면,

南北雙岐善利分 남북의 두 갈래로 선()과 이()가 나눠지네.

暗谷有時生鬼物 컴컴한 골짜기에 이따금씩 귀물이 생겨나다가도,

太陽還復破陰氣 태양이 다시 뜨면 음기를 말끔히 부수네.

却將先哲惺惺旨 옛 철인이 깨우쳐 준 가르침으로,

靜對晴窓一炷薰 고요히 맑은 창 사이 한 심지의 향 연기 마주하네

 

스스로의 마음을 잘 검속하여 사물에 의해 욕심이 동()하거나 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본연지선(本然之善)을 잘 보존하고자 하였다.도학적 본성(本性)의 문제를 깊이 사색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차이를 규명하였다.
 

誠意工夫, 與中庸戒懼謹獨章同一義. 正心工夫, 與中庸喜怒哀樂章同一義. 人雖善良無惡, 而喜怒不節, 終至意反不誠. 喜怒最是害事, 理不勝氣故也.”(수기(修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 공부는 도덕 수양뿐만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



 

택당 시의 풍격(風格): 정심위려(精深偉麗)

 

玉井仙梯不可通

錢塘麗句自生戎

誰知東郡三池艷

不傳河陽一縣紅

 

옥정(玉井)은 선인의 사다리로도 통하지 못하나,

전당(錢塘)의 아름다운 시구가 절로 성하게 솟네.

동쪽 마을에서 세 차례 고운 연꽃 찾은 것을 누가 알리오?

하양(河陽) 한 고을의 붉은 복사꽃도 전해지지 않거늘.

 

淤泥不染眞名喩,

詮偈相傳盛釋徒

賴有濂翁兼雅愛

不將曇蘂共榛蕪

 

賴有 주돈이의 연꽃 사랑에 힘입어 오랜 시간동안 유학자들이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
濂翁兼 공맹의 학문을 계승하였던 주돈이가 연꽃을 사랑한 의미를 택당이 이해 

 
李澤堂杆城郡蓮池絶句, 精深偉麗, 無論東方作者, 雖蘇黃集中, 亦所罕見, 殆可與海山爭其奇秀矣.”(정심위려(精深偉麗)한 것이 우리나라의 작자는 물론이고 소동파와 황정견의 문집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거의 바다나 산과 함께 그 기이함과 빼어남을 다툴 만하다.(정심위려(精深偉麗)한 것이 우리나라의 작자는 물론이고 소동파와 황정견의 문집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거의 바다나 산과 함께 그 기이함과 빼어남을 다툴 만하다.)
 

택당 시의 풍격(風格): 탕일(宕逸) 

岧嶢飛閣郡城隈 성 모퉁이에 드높게 날아갈 듯한 누각,

俯視中州氣壯哉 충주를 굽어보는 기상 장쾌하네.

山鎭東南尊月岳 동남쪽을 제압한 산은 월악산(月岳山)을 우러르고,

水趨西北抱琴臺 서북으로 내달리는 물은 탄금대(彈琴臺)를 안았네.

乾坤縱目靑春動 하늘과 땅 바라보니 푸른 봄기운 일렁이고,

今古傷心白髮催 고금의 일로 상심하니 흰머리 재촉하네.

已覺元龍豪氣盡 원룡(元龍)의 호기 다한 것 이미 알겠으니, 

明朝投劾可歸來 내일 아침 사직하고 귀거래 하리라.
 

少玄凝思選調, 意求雅則, 惟取境不廣, 無縱橫宕逸之致.”(의경이 광대하고 체격(體格)이 한방(閒放)하여 세속의 구속됨이 없이 종횡으로 내달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강연이 끝나고 기념촬영

 

 



2017년 덕수이씨 선조 유덕과 학문강연회 초..
풍성군파종회 선조유적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