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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행사
제 목
제2회 풍성군파 종회 역사 탐방 및 문화강좌

20181013() '22018년도 풍성군(宜蕃) 종회(회장 이재룡) 역사 및 문화강좌의 일환으로 선조 유적 탐방 및 초청 강연'을 마련하여 올해 하반기 행사로 121명이 버스 3대에 분승하여 여주의 대로사, 효종 대왕 능인 영능(寧陵)과 기천서원을 탐방하고 참배하는 일정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택당 이식 선생의 삶과 시대 인식'에 대하여 이상배 박사를 초빙해 명강연을 들었다.



이재룡 회장은 인사 말씀에서 '덕수이씨 풍성군종회에서는 선조들의 발자취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적 가치 계승을 도모하고자 역사 문화강좌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시작하여 1회에는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성균관대학 오석원 교수의 강의가 있었으며 현장 탐방으로 충북 영동 참판공 묘역을 참배 하였습니다. 특히 문화강좌에는 예상의 2배가 넘은 종원들이 참석해 열띤 분위기속에 진행되었으며 모든 종원들이 훌륭한 강좌였다고 격려해주신 바와 같이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추진하는 제2회 풍성군 역사 문화 강좌는 덕수이씨 15대손 택당의 삶과 현실 인식입니다. 택당은 당대에 주목받던 4대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조선 역사 실록을 편찬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붕당의 폐단을 비판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처리를 하시는 한편 검소함을 생활신조로 실천하는 등 후세에도 귀감이 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에 의해 택당에 대한 연구 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선조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仁義禮智 가르침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필요한 만고불변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선조들의 소중한 정신문화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보전 하는 것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선조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시대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강연이 택당에 대하여 후대의 우리 종원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덕목을 계승 하여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종중의 정신문화와 역사의 정체성을 확보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전문가, 교수 등을 모시고 이와 같은 행사를 지속적으로 추진 하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역사 문화 행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종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이 필요합니다. 풍성군 종회가 화합하고 단합하는 아름다운 종중이 될 수 있도록 다 같이 힘을 모아 주시기를 당부 드린다'고 했다. 




택당은 월사 李廷龜, 상촌 申欽, 계곡 張維 등과 함께 조선 중기 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1584(선조 17)부터 1647(인조 25)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 · 정묘호란 · 병자호란 등 대외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이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 큰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가장 혼란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택당이 자식들에게 남긴 5가지 교훈은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해 체득한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제시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택당의 본관은 德水, 자는 汝固, 호는 택당 외에 南宮外史 澤癯居士 등이 있으며, 시호는 文靖이다. 덕수이씨 15대손이다. 그의 직계 4대조인 李荇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東岳 李安訥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지내면서 4,379수의 시를 남긴 문장가로서 그와는 從叔간이다. 뿐만 아니라 덕수이씨 12세손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며, 13대손이 율곡 이이(15361584)이다. 이렇듯이 조선 중기의 덕수이씨 가문은 명문가였다.


학문성숙기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벼슬을 부여받은 1610(광해군 2)부터 1622(광해군 14)까지이다. 그는 1609년 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었으나 과거부정에 휩싸이는 불운을 겪으면서 스스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1613년 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이어 사직하였고, 다시 1616北評事가 되어6개월간 鏡城 일대를 다녀와 사퇴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전관에 임명되어 황해도 일대를 3개월간 다녀온 후 1618(광해군 10) 10월 이후에는 경기도 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여 남한강변 백아곡에 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하였다. 이때 벼슬을 그만 둔 것은 조정에서 廢妃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관직을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1619년 병조좌랑, 영변부판관, 1621년의 원접사 제술관, 진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1621년의 경우 劉鴻訓楊道寅 詔使가 왔을 때 원접사 李爾瞻이 택당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은 보다 명망있는 인물을 종사관으로 하고 택당을 제술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응하지 않다가 광해군이 강하게 명하여 중도에서 합류하였으나 경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결국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던 시기에는 누차 관직을 제수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은둔하면서 학문에 열중하고, 시문을 좋아하는 동류들과 어울려 시문 화답을 즐겨하였다.

이 시기에 주로 어울린 인사들은 石洲 權韠, 鶴谷 洪瑞鳳, 五山 車天輅雲輅 형제, 疎庵 任叔英, 李廷龜, 柳根 등이었다. 권필은 택당의 종숙인 이안눌과 함께 鄭澈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광해군 즉위 후 북인들의 정권 농단과 사회상을 맹렬하게 비판하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인물이다. 홍서봉은 1610(광해군 2) 金直哉獄事에 장인이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은거하다가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을 지냈다. 차천로는 송도 삼절로 불릴 정도로 시문과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 五山說林江村別曲등의 작품을 남겼다. 임숙영은 시문에 능했으며 광해군 초기 북인들의 전횡을 비판하고 영창대군의 무옥에 참여하지 않아 쫒겨나 廣州에 은거해 있다가 인조반정 후에 관직에 나간 인물이다. 이정구는 택당과 함께 한문4대가로 불리는 인물로 좌의정까지 지냈다. 유근은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국정을 농단하고 폐모론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자 곧바로 물러나 괴산에 은거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택당이 주로 어울린 인물들은 대부분 시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광해군 때 북인세력의 정치적 전횡에 비판적인 인물들로서 현실정치로부터 물러나 은둔해 있던 志士들이었다. 택당은 정치적 성향을 같이하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 성숙도를 높일 수 있었다. 결국 이 시기의 택당은 현실정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계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남한강변 백아곡에 택풍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 때였다. 그의 나이 27세에서 39세까지 13년간이다.
 


택당은 인조반정 이후 나이 40에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주위 사람들이 어느 한 붕당에 소속되지 않으면 정치를 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붕당 인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결과 당시의 정치현실을 직시하면서 내린 결론은 붕당에 치우친다는 것은 군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치적 사안에 따라 당론을 같이 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자신의 자세는 당파의 요소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송시열도 송자대전에서 동서로 당이 갈린 이후부터 이것이 나라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朝官들이 당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계해년(1623) 벼슬길에 나간 이후로 特立獨行할 것을 신명에 서역, 그 뒤에 당론이 교란하는 와중에 있으면서도 의연히 부동하여 좌우를 조정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택당의 아들 이단하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하면서 붕당에 가담하여 서인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택당 자신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붕당에 대한 그의 견해는 주강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할 때도 구체화되었다. 당시 시강관이었던 택당은 국왕에게 중용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선조가 김효원을 慶源으로 出補하려 할 때 李珥가 지나치다는 상소를 올려 막은 것을 예로 들면서 붕당간의 保合이 중요함을 간하였다. 이것은 서인과 남인을 고르게 등용하면서 붕당간의 보합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를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학통을 바로잡으려는 서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남인들이 반대하고 나섰을 때 택당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마땅히 온 나라의 定論을 기다려야 한다. 율곡의 도학이 부족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나라 사람의 반수가 따르지 않는데도 억눌러서 시행하려 한다면 이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고 하여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덕수이씨로서 택당의 할아버지 이섭과 형제간이었으며, 택당 스스로 이이를 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존경하고 흠모하였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서인들의 행동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가 당론에 휩쓸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일처리를 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택당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

첫째, 택당은 나아가는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둘째, 그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전문 관료였다.

셋째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통찰력을 갖고 현실을 중시하는 실사구시형 인간이었다.

마지막 네번째로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주창한 역사학자였다.

 

택풍당을 방문하여


영섭대부의 설명을 듣고


택당공 묘소에 이재룡 회장이 잔을 
 

올렸다.




기념촬영


택당공의 교지 등을 배알한 다음 이건영 문정공 회장에게 시계를 기념으로 증정하며 기념촬영


대로서원에 가서


설명을 듣고


효종대왕 능을 향해


오르다 효종대왕비 인선왕후릉에서 또 한 컷


효종대왕 릉을 방문 했다.


세종대왕릉을 향하여


해질녁 세종대왕릉에서 


남한강을 바라 보는 곳의 기천서원에서 설명을 듣고


참배하고


기념촬영

 
에필로그

 
이재룡 회장과 이종기 부화장이 이상배 박사와 담소 모습


이종기 연헌공파 화장과 이재방 전 청장년회 회장


이경순 덕수이씨 부인회 회장 일행


유적 설명에 관심이 크다


효종대왕릉 입구 거목에서 주영대부 내외


효종대왕비 인선왕후릉을 배경으로 억새와 함께한 재민 재욱 아저씨


쎌카 찍는 재덕아저씨


내려가다 만난 대용 형님과


수사공 종손 종재 대부


재석 아저씨와


대종회 이충렬 총무이사와 일행


그리고 재윤 아저씨


세종대왕릉을 뒤로하고 한컷 찍은 수용 형님까지  휴~



제31회 파주 율곡문화제 겸 추향제
자운서원 신사임당 추향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