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종보 영인본 간행

대종회에서는 종회창립 50주년을 기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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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제 목
제1회 풍성군 역사 ​문화강좌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

2017년 9월23일(토) 오전 10시, 덕수이씨풍성군파종회에서 제1회 풍성군 역사​ 문화강좌에서 '율곡이이의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성남시 농업기술센터 대강당에서 이명렬 대종회장을 위시하여 종인 230명이 모인 가운데 2시간에 걸쳐 오석원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성남시 농업기술센터


이명렬 대종회장과 이종국 홍산공파 회장이 


이천용 율곡종손과 인사하고 있다.


풍성군파 이종문 부회장이 대종회장을 영접하고 있다.


종인들이 좌정한 가운데


이종기 이사의 사회로


국민의례와


덕수이씨청장년회 이동하 회장의 종훈 낭독에 이어


이갑렬 풍성군파 종회 회장의 개회사를 이종문 부회장이 대독했다. 

"존경하는 덕수(德水)이씨 종인 여러분!

율곡의 사상과 이해라는 주제를 가지고 풍성군 종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여름의 기록적인 폭우도 지나고 이제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오늘 선선한 날씨와 청명한 공기 속에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초 행사를 기획할 때는 몇 분이나 오실까 걱정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참석 희망자가 계속 늘어나, 이렇게 성황리에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덕수이씨 가문은 조상의 유업을 받드는 일에 매우 열성적이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강연회는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를 가지고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나라의 보전과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을 고심하셨던 우리 율곡 선조의

용기와 지혜는 작금의 혼란스러운 우리나라 실정에 금과옥조로 삼아

반드시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풍성군 6개 소파뿐만 아니라 여러 종중에서 오시고,

가족과 함께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풍성군 종회는 종인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덕수이씨의 긍지를 함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앞으로 덕수이씨 문중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드리며

인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2부 순서로 오석원 선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요,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이며 교육사상가이다. 그는 송대의 주자학을 스스로 연구 검토하여 비판하고 수용하였으며, 새로운 한국유학의 경지를 개척하여 기호학파의 연원을 열었다. 단순히 주자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양명학은 물론 불교와 노장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여 집대성하였다. 율곡의 사상은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정신과 이론과 실재를 매개하려는 실학정신에 그 특징이 있다.

율곡이 생존하였던 16세기는 무오사화(1498)를 시작으로 하여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 등 계속된 사화들로 인하여 많은 신진 사림들이 몰락되어 정치가 문란하고 인륜의 도덕이 무너지던 시기이다. 개국이래 수성기(守成期)를 지난 이 때의 조선사회는 교화가 밝지 못하여 사회 기강이 해이하여지고, 강직한 선비정신이 와해되어 양심이 마비되고 명예만 숭상하는 풍조가 만연됨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율곡은 이론적으로 확고한 철학사상과 투철한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으로는 덕성을 함양하여 인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사리(事理)에 밝아서 국가를 경륜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즉 개혁의 주체인 인간의 성실을 지극히 중요시한 것이며, 동시에 개혁원리로서의 변화와 무실(務實)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하여 비록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국사(國事)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율곡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혁신을 강조하였으며, 민생의 고통을 덜기 위한 폐법의 개혁, 미풍양속을 이루기 위한 향약과 사창(社倉)의 장려, 정치 안정을 위한 동서분당의 조정 노력, 국란을 대비하기 위한 10만 양병론 등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억울한 계층을 풀어주는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현대의 의회제도와 여론정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사(經濟司)의 설치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주장은 모두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제시된 것이며, 그의 탁월한 식견과 고매한 인격, 깊은 학문은 후대의 사표가 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며,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1536(중종, 31) 1226일 강릉 외가의 별채인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李元秀:1501-1561)와 모친 사임당(師任堂) 평산 신씨(平山 申氏, 본명은 신인선(申仁善:1504-1551)으로 신명화(申命和)와 용인이씨(龍仁李氏)5녀 중 차녀)와의 사이에서 7남매의 다섯째(맏형인 선()은 호가 竹谷이며 남부참봉을 역임하였으며, 큰누이인 매창(梅窓)은 여류화가로서 이름이 높고 조대남(趙大男)에게 출가하였으며, 둘째 형인 번()은 호가 정재(定齋)이고 학식이 매우 높았으며, 둘 째 누이와 여동생은 윤섭(尹涉)과 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 동생인 우()는 호가 옥산(玉山)으로 괴산고부비안 등의 군수를 역임하였음)로 태어났다.

6(1541)까지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와 외조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다가 서울에 올라왔으며, 8(1543)때 부모를 따라 선영이 있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겨 살았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난 그는 이 때에 임진강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서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저물었는데(林亭秋已晩), 나그네의 회포 다할 길이 없어라(騷客意無窮),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遠水連天碧),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하여 붉구나(霜楓向日紅),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토해 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리로 부는 바람을 머금었구나(江含萬里風),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塞鴻何處去), 저녁 구름 속으로 울음소리 끊어져 버리네(聲斷暮雲中)”라는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또한 13(1548,명종3)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였고, 29(1564) 8월 명경과(明經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기까지 9차례의 시험에 모두 수석을 차지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명칭을 받기도 하였다.

율곡은 16(1551)에 모친상을 당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모시고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으며, 19(1554)에 금강산에 들어가 약 1년 동안 불교공부에 몰두하였고, 20(1555)에 다시 강릉 외가로 돌아와 유교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입산하기 직전에 율곡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과 도의(道義)의 친분을 맺었으며,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절차탁마하였다. 23(1558) 봄에는 강릉으로 가는 도중 안동의 도산에 은거(隱居)하고 있던 퇴계(퇴계) 이황(李滉:1501-1570)을 방문하여 2일간 머무르며 학문을 논하였다. 율곡이 떠난 뒤 퇴계는 율곡의 인격과 학문에 대하여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로 극찬하였다. 그 해 서울로 올라온 율곡은 겨울 별시(別試)인 과거에 응시하여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명문으로 장원하였다. 당시 고관(考官)들은 율곡의 답안지를 보고 우리들은 몇 일 동안 생각해서 겨우 이렇게 만들었는데 짧은 시간에 이렇게 쓸 수 있다니 참으로 천재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율곡은 22(1557)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인 노씨(盧氏)와 혼인하였으나 자손을 두지 못하였으며, 뒤에 측실에서 21녀를 두었다.(39세 때 맏아들 경림(景臨), 44세 때 둘째아들인 경정(景鼎)을 낳았으며, 그의 딸은 뒤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의 소실로 출가하였음) 26(1561)에 부친상을 당하여 파주의 선영에 모시었다.

율곡의 벼슬은 29(1564) 명경과에 합격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를 맡은 이후, 30(1565)에 예조좌랑(禮曹佐郞)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33(1568)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조좌랑을 역임하고 서장관으로 明京을 다녀왔다. 이후 34(1569)에 교리(校理), 35(1570)세에 청주목사, 38(1573)에 직제학(直提學), 39(1574)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황해도 관찰사, 40(1575)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46(1581)에 사헌부 대사헌호조판서, 47(1582)에 이조판서(吏曹判書)형조판서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등을 역임하였다.

율곡은 35(1570) 청주목사 재임 시에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지어 일찍부터 주민들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이미 1560년에 파주향약(坡州鄕約)의 서문을 지어 20대 초부터 사회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율곡은 서원향약의 경험을 살려 42(1577)에는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지어 실행하였으며, 사창(私倉)을 설치하여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해주 지방은 투박하였던 풍속이 아름다운 예속으로 바뀌었으며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식이 생활화되었다.

율곡은 32(1567)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학(大學)의 내용을 논하였으며, 33(1568)에 성혼과 지선(至善)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37(1572)에는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40(1575)에 사암(思庵) 박순(朴淳:1523-1589)과 기론(氣論)에 대하여 논변하였다.

율곡은 34(1569)󰡔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왕과 신하들의 책임의식, 도학의 실천, 백성들의 교육과 생활안정 등을 강조하는 내용의 글을 선조에게 올렸으며, 39(1574) 에 당시 선조가 천재(天災)로 인한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묻자, 율곡은 󰡔만언봉사(萬言封事)󰡕을 올려 먼저 국가 지도자들이 선정(善政)을 대한 강한 의지와 실천,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40(1575)󰡔사서언해(四書諺解)󰡕를 저술하고, 임금의 학문과 치도(治道)를 위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렸다.

41(1576) 이후에는 모든 관직에서 은퇴할 것을 결심하고 율곡은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 약 5년간 저술과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42(1577)에 초학자들을 위한 도덕실천의 지침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44(1579)󰡔소학집주(小學集註)󰡕를 저술하였다. 45(1580)󰡔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고, 46(1581)1565년부터 이 때까지의 까지 약 16년간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다. 47(1582)에 선조의 명을 받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제진(製進)하였으며, 󰡔학교모범(學敎模範)󰡕에 관한 저술을 통하여 교육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46세에는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였으며, 48(1583)시무육조(時務六條)을 계진(啓陳)하고, 선조에게 10년 내에 국란이 있을 것이므로 이에 대비한 10만 양병설을 진언하였다.

율곡은 49(1584) 114일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서익(徐益)이 북로(北路) 순무(巡撫)의 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 임무수행에 관한 내용으로 6개 조항을 불러 주어 아우 우()로 하여금 기록하여 전달하게 하고는 2일 뒤인 16일에 서울의 대사동(大寺洞)에서 별세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마지막까지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혼은 상소문에서 율곡에 대하여 오직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시국을 구제하려는 데 급급하여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온 인물이다라고 평하였다.

 

율곡은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1624(인조2)에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1(숙종7)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원도 동해의 한천서원(寒泉書院), 강원도 명주의 송담서원(松潭書院), 경북 청송의 병암서원(屛巖書院), 충남 논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충북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을 비롯하여 강릉의 문성사(文成祠), 강원도 정선의 노추사(魯鄒祠), 전북 익산의 담월사(潭月祠), 전북 진안의 주천사(朱川祠) 등 전국 20여개 서원과 사우(祠宇)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1682년에 이루어지고, 197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출간하였으며, 번역본은 1988년 한국정신문화 연구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3. 사상

1) 이기론(理氣論)의 특징 

 율곡사상의 이기론은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 이기지묘설(理氣之妙說)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송대의 유학에서 본질과 현상,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 이기론(理氣論)이다. ‘는 무형(無形)이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져서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지만, ‘는 유형(有形)이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 되어지며 국정(局定)된다는 것이 이통기국설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이와 기의 기본 성격에 대하여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고 하는 기본 입장을 갖는다

이기의 동정(動靜) 문제에 있어서는 율곡은 의 무위(無爲)의 유위(有爲)에 중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발동하는 것은 기요, 발동하는 까닭은 이이므로 기발(氣發)은 인정하지만 이발(理發)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율곡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므로 자연세계나 인간세계를 막론하고 모든 존재의 작용은 기에 있을 뿐이며 이는 이러한 기 위에 타고 있다는 기발이승설로 일관하여 설명한다.

 

이기의 관계에 대하여 율곡은 이와 기를 나누어 보기보다는 합쳐서 보는 일원론적인 입장을 갖는다. 이기의 근본 성질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다름이 있지만 사실적 입장에서 볼때는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기의 관계를 율곡은 하나인 동시에 둘이요(一而二), 둘인 동시에 하나(二而一)라는 이기의 묘합(妙合) 관계로 설명하였다. 여기서의 묘합은 단순한 통합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로서의 이와 구체적 실체로서의 기가 각각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포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율곡은 실재로서의 기와 소이연(所以然)으로서의 이의 상이성(相異性)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양자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종합적으로 올바르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 인성론(人性論)의 특징율곡의 학문은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원리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인성론에 최대의 중점을 두고 있다. 율곡은 인성론은 기질지성(氣質之性) 속에서 본연지성(本然之性), 칠정(七情) 속에서 사단(四端), 인심(人心)속에서 도심(道心)을 이해하려는 일원론적인 입장을 갖는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본래의 하나의 성이지만 이()적 측면만을 가리킬 때에는 본연지성이라고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서 파악할 때는 기질지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나누어 보면 별개의 것으로 오해되기 쉬우므로 기질지성 속에서 본연지성을 파악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칠정과 사단의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해서 말하면 칠정이요, 그 중에서 특히 선()한 측면만을 지칭하면 사단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칠정과 사단을 별개로 보기보다는 칠정 속에 사단을 파악하는 일원적 입장의 인간이해를 갖는다.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두 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천리(天理)인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한 것이 도심이요, 육체적 인욕(人慾)을 위해서 발한 것이 인심인 것이다. 비록 도의를 위하여 발하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사욕이 개입하면 그 순간 인욕으로 떨어지게 되며, 육체적 욕망을 위하여 발했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이치에 중절(中節)하면 이것은 천리하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인심과 도심의 명칭은 둘이지만 그 근원은 오직 한 마음에 있음을 강조한 율곡 인심을 곧 인욕으로 규정하여 악으로 보기보다는 인심에 자리하고 있는 선악 가운데 선한 면을 강조하여 인심을 긍정적 시각에서 보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욕으로 빠질 위험성을 지닌 인심을 어떤 방법으로 도심화(道心化)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다.

 

 

3) 수양론(修養論)의 특징

 유학에서는 인간의 성선(性善)을 신뢰하는 기반 위에서 누구나 선한 본성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율곡은 학문의 목표를 이러한 최고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성인에 두고 지속적인 수양을 통하여 인격을 도야함에 중점을 두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인데 악으로 흐르게 되는 원인은 기품(氣稟)의 구애(拘碍) 때문이다. 즉 선악은 기의 청탁에 달린 것이며, 맑은 기가 발하면 선하고, 흐린 기가 발하면 악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선한 본성을 가려 악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기이지만, 그 선한 본성을 발현시켜주는 것도 기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맑은 기가 순선(純善)한 본연지성을 잘 발현시켜 주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어 탁기(濁氣)를 청기(淸氣)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기질의 변화(矯氣質)를 강조하였다.

율곡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구체적 수양 방법으로 성()을 강조하였다. 성이 아니면 뜻을 세울 수 없고, 성이 아니면 이치를 깨달을 수 없으며, 성이 아니면 기질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율곡은 성을 실리(實理)의 성과 실심(實心)의 성으로 나누어, 천도(天道)는 실리이고 인도(人道)는 실심이라고 하였다. 즉 율곡이 강조한 성이란 위로는 천과 인간을 일관하는 원리로서 모든 사물의 존재근거이며, 아래로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기품의 제약을 극복하고 선을 구현하고자 하는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율곡은 성은 경()의 근본이고, 경은 성을 회복하는 공부이다라고 하여 경으로써 성을 보존하여야 함도 강조하였다.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바로 성현(聖賢)의 학문이라고 말하였다. 지식을 넓히는 일은 착한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고, 그 지식을 몸소 실천하는 일은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수기에는 지식을 넓히는 일과 그 지식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수양론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곡 성학의 특징은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보편성과 구체적 현실의 특수성을 조화시키려는 실학정신에 있는 것이다.
 

 

4) 교육사상의 특징 

율곡은 교육의 이론 뿐 아니라 스스로 교육을 실천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41(1576)이후에는 관직을 떠나 해주의 석담(石潭)으로 퇴거하여 5년간 후진 교육에 힘썼던 것이다. 율곡은 교육을 통한 점진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교육은 가정교육으로부터 비롯하여 유아기, 청소년기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어 종족이 함께 살면서 지켜야 구체적인 규범을 정하였으며, 󰡔소아수지(小兒須知)󰡕를 지어 가정생활에서 어린이들이 실천해야 할 기본예절과 생활습관에 관한 내용을 밝혔으며, 󰡔학교모범󰡕을 지어 구체적인 학교교육의 내용을 제시하였으며, 󰡔격몽요결󰡕을 지어 청소년들이 습득해야할 도덕내용들을 뽑아 쉽게 해설하였으며, 󰡔소학󰡕을 통한 국민교육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율곡의 교육의 동기로서 입지(立志)를 강조하였다. 입지는 자기 의식에서 출발한 참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가늠하는 힘이 되는 동시에 학문을 나아가게끔 하는 동력이 되므로 뜻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교육에 있어서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학교모범󰡕에서 교육자의 진실되고 올바른 자질을 중요시하였다. 교사의 우수한 자질에 의해서만 최선을 다하는 교육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율곡은 구체적인 교육방법으로서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을 강조하였다. 즉 거경은 학문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것이요, 궁리는 당위성의 법칙과 선을 밝히는 것이요, 역행은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앎과 실천을 연결하여 지행병진(知行竝進)을 강조하는 그의 교육방법은 현실을 떠난 이상적 교육사상가가 아니라 수기와 치인 양면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의 교육사상은 이상적인 인간상인 성인을 목표로 하여 입지를 굳건하게 하고 성실을 기반으로 하여 지식과 덕성과 체력을 겸비한 균형 있는 전인(全人) 교육을 하는데 있다. 율곡은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통치자인 군왕부터 성학(聖學)을 목표로 하여 자신을 닦고 올바른 철학과 교육관을 가지고 교육정책을 실행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율곡은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향약을 통한 사회교육실천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560년에 파주향약의 서문을 짓고, 1571년 청주목사 재임 시에는 서원(西原)향약을 짓고, 1577년에는 해주에 머물면서 해주향약과 사회계약속(社會契約束) 등을 제정하여 사회교육을 실시하고 상부상조의 정신과 예속을 통한 민풍(民風)의 진작에 힘썼던 것이다.

 

4. 결론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이념은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서구 근대사회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합리주의 사상에는 물질과 정신, 개인과 집단, 인간과 자연 등의 상이한 두 가치와 이념에 대하여 종합적이고 상호보완적 대대(對待)의 관계로 보기보다는 분석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러한 분석적인 합리주의 정신은 과학적 사고를 촉진하였지만,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합리주의는 배타적 양극의 논리로 인하여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문제를 더욱 제고시켰던 것이다.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현대사회의 근본적 가치관은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의식에 정초(定礎)되어 있다. 개인과 사회, 국가와 민족의 관계 등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자기 이익을 위한 실리추구에 있다. 경제적 실리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가치관은 산업, 과학, 의료기술의 경이적인 발전을 촉발시켜 물질의 풍요와 인류의 복지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는 상대적으로 정신적 도덕성을 약화시키고, 수단이어야 할 물질이 목적 그 자체가 됨으로써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상실되었다. 또한 물질에 대한 소유의 끊임없는 욕구는 상대적 빈곤의식으로 인하여 결핍감과 불만감 적대감을 촉발시키고, 더 많은 물질을 획득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함으로써 사회비리와 폭력사건 등의 병리현상을 유발하였다.

서구사상의 비판 없는 수용은 교육의 현장에도 커다란 문제점을 초래하였다.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서양교육사조의 맹목적인 수용은 무한경쟁을 통한 사회구성원간의 갈등현상 속에서 지식과 기능위주의 교육으로 전락시켰다. 특히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이기적인 풍조와 세태 속에서 올바른 가정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도덕교육을 외면한 학교 교육은 참된 인간교육을 더욱 황폐화시켜 청소년들의 폭력과 비행을 조장하고 교육의 총체적인 위기상황을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의 빈곤으로 인하여 정부가 시도하는 교육개혁도 지엽적인 방법에서만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사회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이 회복되고, 인간화된 사회를 지향하는 세계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방향의 과제는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물질의 추구, 공동체의식과 책임의식을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 자연과의 공존과 친화적(親和的)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 학교, 사회가 연계되는 교육이어야만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즉 올바른 가정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근본을 배양하고,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적극적인 사회정화를 통하여 건전한 시민의식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위기상황으로 진단되는 한국의 현대사회에서 이상과 현실을 알맞게 조화시키는 율곡의 철학사상과 도덕적 실천을 중요시하는 율곡의 인간교육은 재조명되어 새롭게 보충되어야 한다.


 
 오석원 선생을 모시고 기념 촬영



에필로그















 



덕수이씨 제122호 종보
2017년 덕수이씨 선조 유덕과 학문강연회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