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손 이두영화백(초대디지탈아트협회 회장)께서 평생동안 만드신 많은작품들을  JPG file 로 보관중인데 관심있는 종인들에게는 무료로(인쇄는 필요하신분이 출력할것)제공..

   
 
 
구 분
모임
제 목
제170회 덕수이씨 청장년회 산악회 산행 및 답사

2019년 11월 10일(일) 오전 10시 산성역에서 만나 남한산성의 선조 유적 찾기와 산행을 겸했다.


우선 침괘정[枕戈亭]영조 27 (1751)에 광주 유수 부임한 18세조 목곡공(휘 箕鎭)이  창을 베게로 삼는다라는 뜻으로 편액하여 붙였는데 잘 때에도 항상 국방의 일을 생각하리는 의미로 진해진다. 한문으로는 침과정이나 그전부터 불려오던 대로 그냥 침괘정으로 불리고 있다.



한 부부가 추억을 남기는데 남편분이 쑥스러워하고 있다.


답사 코스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오매! 단풍들었네!


사람과 풍경이 하나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은  햇볕도 들지 읺을 뿐더러 구름 낀 날이라 땀도 나지 않고 걷기엔 그만인 날이다.


산성에 올라


목을 축이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니


롯데 타워가 조그맣게 보인다.


도봉산 또한 그림으로 다가 온다.


이쪽을 봐도


서울시내가 이런 풍경이었던가?


북문인 전승문에서 인증 샷!


택당공(휘 植)의 증손인 18세조 목곡공(箕鎭)114년 후인 1751년 광주유수로 부임하여 남한 산성도를 제작하고, 남한일기를 발굴하여 배포하였으며, 남격대를 수축(修築)하고 이현에 나무를 길렀다. 이어 수어장대(守禦將臺)를 중건했다. 그리고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현판과 2층 안쪽엔 무망루(無忘樓) 현판을 걸었으며 서장대무망루기(西將臺無忘樓記)가 전한다.


무망루(無忘樓) 현판
인조가 겪었던 8년 동안의 병자호란의 시련과 아들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갔던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며 잊지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별칭을 부여했다.
이 무망루 현판은 영조가 쓴 친필로 현판은 보호각에 보관하고 있다. 



다른 팀도 촬영해주고


수어장대 오른 편의 매바위에는 '수어서대'라 암각되어 있다. 


그리고 치욕의 풍상을 목도했을


소나무 아래서 또 인증 샷!


늦게 도착하신 종권 회원님를 위해 다시 한 번


행궁을 가다가 고운 단풍과

시인 이종권

攄淂階段

 

꽃이 피기 전에는

꽃을 몰랐다.

 

꽃이 피고나서야

꽃을 알았다.

 

꽃이 지고나니

꽃이 그립다.

 

예전엔 몰랐고

뒤늦게 알았고

이제야 그립다.

꽃사과도 만난 다음


행궁에 도착했다.
“16361214일에는 병자호란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을 호종(扈從)했다. 하필 이날은 눈이 많이 왔다. 인조는 조정 신하 가운데 늙고 병든 자들을 먼저 강화도에 들어가라고 하였다그러나, 14세조 동악공(安訥)나라의 녹을 먹은 자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들것에 실려 갈지언정 호종(扈從)의 길을 택했다 

성내(城內)에서 반갑게 만난 조카는 강성 척화론자로 삼전비문 짓기에 거론조차 되지 않은 택당 이식과 후에 어쩔 수 없이 삼전도비문을 지어 채택된 이경석도 만났다. 이경석은 당시 날은 어둡고 크게 눈이 내려, 언 언덕이 험난하였고, 공도 천식이 들렸는데도 말을 버리고 나의 손을 잡고서 걸어갔다. 나는 무척 머쓱해서 누차 사양하였으나, “자네가 걷는데 내 어찌 말을 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밤마다 걸어서 한두 번은 행궁에 갔다. 돌아오면 공은 손을 붙들고 통곡하였는데, 공의 충의로운 마음이 저절로 소리와 기색으로 드러나 보이니 슬펐다고 회고했다.

앞서 10년 전인 인조 5년인 1627년의 정묘호란에서도 13세조 강민공()충청 병사(忠淸兵使)를 마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제수받아 부임했으나 그동안 힘을 키운 후금의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3만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안타깝게도 중과부적으로 분사하고 말았다.

14세조 두곡공(景容)은 광주(廣州)와 죽산(竹山)에 소속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지켰다.
 동생 지전공(景憲)1627(인조 5) 정묘호란 때에 이어 이번 병자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했다. 그 후 1639년 서추 겸 동지의금부사(西樞兼同知義禁府事)가 되고, 사은사의 부사로 심양(瀋陽)에 가서 볼모로 있는 세자를 원손과 대치하려고 노력한 것이 왕의 뜻을 어겼다 하여 남양(南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귀국하자 죄가 풀려 공조 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막냇동생 정언 미강공(景曾)은 명나라에서 내려준 금보(金寶)를 청나라에 넘기지 말 것을 간언했다.
15
세조 목사공()은 호부랑으로 인조를 호가(扈駕)했다.

 

들어 갈 때나 나올 때에도 긴줄은 여전하다.


 오늘도 유쾌한 술잔으로 하루를 잊는다.


저녁 6시쯤 집에 도착하니 우산을 든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는가 싶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충무공이순신 운구행열재현행사
‘판관대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를 위한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