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종보 영인본 간행

대종회에서는 종회창립 50주년을 기념하..

   
 
 
충청지역 유적지

유적지명
팔괘정 (八掛亭)
주소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
지정번호
시도유형문화재 76호
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유적지명
신항서원
주소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지정번호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위치해 있는 신항서원(도 기념물 제42호)은 선조 3년(1570년)에 창건되었는데 당초에는 이곳 유정골의 이름을 따서 유정서원이라 칭하였다.

현종 원년(1660년)에 사액을 받아 이름을 신항서원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름은 중국의 성현인 이윤과 안자의 출생지인 '신야'와 '항루'에서 비롯되었다.

그후 유림에 의해 계속 중건되어 오다가 고종 8년에 서원훼철령으로 폐하였다가 고종 29년(1892년)에 복구가 허가되어 광무 9년(1904년)에 복구되고 1957년 지방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항서원은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건물이며 내삼문 밖에 강당과 행랑채가 있다.

또한 서원마당에는 숙종 11년(1685년)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조형기가 썼다.

배향인물로는 처음에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를 모시다가 인조 20년(1642년)에 한충을 추향하고 효종1년(1650년)에 송상현, 이득윤을 추향하고 효종7년(1656년)에 이이, 이색을 추향하여 총 9분을 모시고 있어 사당명칭이 구현사(九賢祠)이다

유적지명
서원향약비
주소
청주시 중앙공원
지정번호
 
중앙공원내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율곡 이이선생이 청주목사로 재직당시(1571, 선조4년) 제정한 서원향약을 기념하여 1993. 4. 11에 건립한 서원향약비가 있다.

(가로 300, 세로 160, 두께 45) 향약이란 전통의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악한 것은 경계하는 약속을 지방 자체로 하는 것으로 오늘날 지방자치의 시초로 볼 수도 있다.

서원향약은 향약설립 초기에 향약의 기본내용을 정립한 것으로 우리나라 향약의 표본이 되었다

유적지명
풍림정사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눌곡리126-3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28호
이 건물은 조선 말기 헌종조(1834∼1849)의 성리학자인 호산 박문호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책을쓰며 후진을 양성키 위해 고종 9년(1872)에 세운 건물이다.

지금은 호산의 위패를 모시하고 있으며, 또한 후성영당은 호산이 주자,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남당 한원진 등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호산 박문호선생은 회북면 눌곡리 출신으로 한말 개화기의 수난속에서 살면서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을 길러내는데 생을 받친 성리학자였다

유적지명
후율당
주소
충북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181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조선 선조 21년(1588)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께서 보은 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에 낙향하여 살 때 율곡(栗谷) 이이(李理) 선생을 경묘하여 그 뒤를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용촌 밤티에 담을 짓고 후율당(後栗堂)이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 선생은 후율당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명을 규합,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철종 5년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이건하였다가 1864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하였다

유적지명
죽림서원(황산서원)
주소
강경읍 황산리 101번지
지정번호
 
이 서원은 1626년(인조4년) 창건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고 율곡 이이(李珥), 우계 성혼(成渾), 양 선생을 배향해 오다가 후에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추배하였으며, 1665년(현종6년)에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고 정암 조광조(趙光祖), 퇴계 이황(李滉), 우암 송시열(宋時烈) 3선생의 위패를 추배하였다.

1871년(고종8년)에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철되었다가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1946년 단소(壇所)를 설단(設壇)하여 봉향해 왔다

유적지명
이 충 무 공 묘 (李 忠 武 公 墓)
주소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
지정번호
사적 제112호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최후를 마친 것이 선조32년(1598)10월 18일이었는데 그해에 고향인 아산으로 운상하여 선영이 있는 곳에 안장한 것은 선조33년(1599년) 2월이었다

유적지명
이충무공 사적비(李忠武公 史蹟碑)
주소
충남 아산시 온천동 69-10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0호
충무공 이순신(1545-1598)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이다.

비각은 정면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며 비석은 화강암의 귀 부위에서있다.

1951년 이충무공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국민의 성금으로 이 비를 세웠다.

비문은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썼으며 현판은 이시영 전 부통령이 썼다.

비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 때 전장에서 왜적과 싸운 내용을 담고 있다

유적지명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
주소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84-1 외
지정번호
사적 제155호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재 아산 현충사를 말한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지금 인현동)에서 태어나셨는데 본관은 덕수(德水), 부는 정(貞)이다.

어릴 때 이곳으로 옮겨 살아 종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종가 앞에 우물, 활터등이 보존중이다.

종가에는 이충무공의 친필, 난중일기등이 보존되어 왔다.

조선 숙종 30년(1704) 이곳 유생들이 사당 세우기를 상소하여 숙종 32년에 조정이 허락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국왕이 현충사로 사액 하였다.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훼철 되었다가 1932년에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전국민의 성금으로 현충사를 복원하였다.

1962년 충청남도 지사가 이 충무공 탄신기념사업위원장이 되어 경내를 확장하고 유물전시관 등을 신축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를 계획하여 본전등을 건축하고 1967년 현충사를 사적 제155호로 지정하였다.

1967년 이충무공 제422회 탄신기념 및 성역화 준공식을 거행하였는데 본전과 내삼문, 홍삼문, 정려, 정문, 고택, 충무정, 활터, 유물전시관, 그 외의 부대시설을 갖추면서 주변을 조경하여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의 유허를 완전히 성역화 하였다

유적지명
경율당
주소
충북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 523번지
지정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조선 영조(英祖) 12년(1736) 경율(景栗) 전후회(全後會)가 마을입구에 서당을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경율당(景栗堂)이라 하였다.

경율 전후회는 율곡(栗谷) 선생의 학덕을 숭모하여 "율"(栗)자를 즐겨 섰다고 한다.

경율당은 후손들의 학문 연수와 인격수양의 도장으로 활용했으며 용궁전씨(龍宮全氏) 종중의 친화 장소이기도 하다

유적지명
온양신정호수이충무공동상
주소
충남 아산시 방축동
지정번호
 
신정호관광지는 1993년 아산시 방축동 일원에 272,000㎡로 조성되어 잔디광장, 조류사, 야생화공원, 조각공원, 청소년수련시설등과 8.45m의 이 충무공동상이 있는 곳이다

유적지명
금강사
주소
 
지정번호
 
 

유적지명
표충사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87
지정번호
지방기념물 제 17호
표충사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7년(1731)에 청주읍성 북문밖에 세운 사당이다.

3분의 충신을 모셨다하여 삼충사(三忠祠)라고도 하며 영조 12년(1736)에 사액되었다.

이 사당은 1939년 일제의 시가지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우암산 산밑으로 이전되었는데, 지금의 사당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또한 사당 동쪽에는 홍림을 따르던 기생 해월의 덕을 기린 열녀문이 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즉위과정에서 실각한 소론, 남인, 북인 일파가 청주성을 거점으로 영남, 호남 반군의 지원을 받아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고자 일으킨 난(亂)이다.

당시 상여 행렬로 가장한 반란군은 청주성의 비장 양덕부와 내통하여 성으로 들어 왔는데 병마절도사 이봉상은 창졸간에 붙잡히게 되었고 반란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남연년, 홍림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러나 이 난은 주도층의 내부 결속력 취약, 지도력 부재 및 영호남 세력의 북상실패, 서울의 내응 불발로 1개월여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유적지명
이봉상신도비
주소
 
지정번호
 
 

유적지명
청계서원
주소
 
지정번호
 
 

유적지명
강선대
주소
 
지정번호
 
금강(錦江) 기슭의 기암절벽(奇岩節壁)과 노송(老松)이 울창한 곳으로 대(臺)밑을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神仙)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하였으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훌륭한 시가 있다.

1956년 5월 10일 여씨 문중에서 6각정을 건립 하였는데, 둥근 기둥에 시멘트 6각 기와집으로 6.6m이다

유적지명
향현사(동악서원)
주소
당진군 송산면 명산리
지정번호
 
 

유적지명
이안눌공덕비
주소
정미면 사관리.
지정번호
 

유적지명
이안눌의묘
주소
 
지정번호
 

유적지명
백원서원
주소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지정번호
 
신잡 선생이 이 곳에 은퇴한 뒤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청년제자 들을 모아 교육하기를 낙(樂)으로 삼았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항상 충효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그 서원의 명칭을 백원서원(百源書院)이라 하였다.

이 서원에는 이 지방 줄신 선현(先賢)으로 학문과 효행이 탁월했던 이종학(李鐘學), 김덕숭(金德崇), 이여, 이부(李阜)를 배향(配享)하여 그 학행을 본받게 하였다

유적지명
이의무신도비
주소
송산면 도문리 산79-1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313호
송산면 도문리 능안마을 입구에 오른쪽으로 덕수 이씨 묘역이 있다.

묘역을 올려다보면 위쪽에 공의 묘소가 있고 묘소앞에 신도비가 서있다.

비의 두전에는 『증령의정이공신도비명』이라 하였 는데 비명의 서는 좌의정 홍언필이 지었고 글씨는 성균진사 신효중이 썼다.

바로 옆에 있는 것이 귀부인데 중간에 마손되어 12대손인 필신이 지금의 농대석으로 바꿨다는 기록이 비신 뒷면에 새겨져 있다

유적지명
연헌제
주소
송산면 도문리 산79-1
지정번호
 
송산면 도문리 능안마을 입구에 있다

유적지명
이행의묘
주소
송산면 도문리 산79-1
지정번호
 
송산면 도문리 능안마을 입구에 오른쪽으로 덕수 이씨 묘역에 있다

유적지명
덕수이씨 6세8효정문
주소
 
지정번호
 
이 정려문(旌閭門)은 조선 선조(宣祖)때부터 영조(英祖)때 까지(1574∼1733) 덕수이씨가문에서 배출한 효자(孝子) 6인과 효부(孝婦) 2인에 대한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영조 40년(1764)에 한곳에 모아 건립한 것이다.

선조 7년(1574) 지극한 효도로 신령이 도와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 부친을 봉양 하였다는 이학수(李鶴壽), 숙종 32년(1706) 손가락을 깨물어 부친의 병을 구한 이탱(李 ), 시부(媤父)에게 침입한 강도를 설복(說服)시킨 관성전씨(管城全氏), 할머니의 소원을 위해 눈 덮인 산에서 감귤을 얻었다는 이복초(李復初), 시할머니가 치아가 없어지자 자신의 젖으로 봉양한 구례장씨(求禮張氏), 경종 원년(1721) 양친의 시묘(侍墓)를 6년간 정성으로 하면서 손발톱이 빠졌다는 이만춘(李萬春), 영조 9년(1733)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겨울철에 잉어를 구하여 봉양한 이정철(李廷喆), 불 속에서 부친을 엎고 나온 이채(李埰)가 이 정문의 주인공들이다.

효(孝)란 부모님 생시에는 극진한 마음으로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섬기고, 사후에는 법도(法道)에 따라 예(禮)를 다하여야 하는 것으로서 효도가 매우 특출하다 하여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는 경우가 흔치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여러 세대 즉 6세에 걸쳐 8인의 효자, 효부가 배출됨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것으로서, 잊혀져 가는 효(孝)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귀감이 되고 있다

유적지명
덕수이씨정려 (德水李氏旌閭)
주소
원정동 기성초교 원정분교 옆
지정번호
문화재 자료
정려는 1997년 2월에 폐교된 기성초등학교 원정분교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있고 멀리 뜰 가운데로 갑천이 흐른다.

이 정려는 송병조(宋炳朝)와 혼인한 덕수이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송병조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손자로 그와 혼인한 덕수이씨는 시부모와 남편을 지성으로 섬겼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죽자 예를 다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이러한 덕수이씨는 정절을 후세에 널리 기리기 위하여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정려문을 세웠다.

현재의 정려문은 후손들이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려각은 1726년에 내린 '열부학생송병조처덕수이씨지려(烈婦學生宋炳朝妻德水李氏之閭)' 란 정려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안에는 '열부덕수이씨정려추기비(烈婦德水李氏旌閭追記碑)' 란 비와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려 추기비는 1985년에 정향 조병호가 짓고 썼으며, 편액은 1773년 송계한이 쓴 '정려중건기(旌閭重建記)'와 1908년 6대손 송의로가 쓴 '정려이건기(旌閭移建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