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손 이두영화백(초대디지탈아트협회 회장)께서 평생동안 만드신 많은작품들을  JPG file 로 보관중인데 관심있는 종인들에게는 무료로(인쇄는 필요하신분이 출력할것)제공..

   
 
 
구 분
행사
제 목
제 3회 풍성군종회 역사문화 강연

2019년 08월24일(토) 수원에 있는 노보텔 엠버서더 호텔 2층에서 배기역사전문 강사를 모시고 이이·이순신 리더십과 새로운 해석을 주제로 덕수이씨 종인 등 150여 명이 모인 가움데 역사문화강연이 있었다.


노보텔 엠버서더 호텔에서


이재용 풍성군ㄹ파 회장은 인사말에서 "
우리나라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이 많지만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만큼 잘 알려진 인물도 많지 않습니다. 4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두 분의 업적은 점점 그 빛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한 시대에 태어나 한 분은 학자와 정치가로서 한 분은 나라를 지키는 장수로서 존경을 받고 있음은 우리 덕수문중의 자랑입니다. 두 분은 덕수이씨 명문 가문의 반열을 더욱 굳건히 올려놓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두 분을 함께 논하여 본 적이 없어서 늘 두 분과 그 시대 운명적인 삶을 조명하여 보고자 하는 오랜 바람이었던 차에 시대적으로 재해석이라는 주제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율곡은 조선 최고의 지성으로 위대한 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로서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이 존경하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49세 길지 않은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사람다움의 길에 대하여 성찰하고 실천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일찍이 붕당의 피해를 지적하면서 소모적인 분열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한창 일하실 나이에 돌아가시어 그 뜻을 펴지 못하니 이후 당쟁의 격화가 심하여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초래하였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율곡이 좀 더 사셨으면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지금으로부터 423년 전입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2323승 기적의 해전은 적국인 일본과 중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 등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나 이러한 평가와 달리 내면을 보면 왜적과 싸우면서도 질시와 모함으로 파면 그리고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홀로 버텨야 했습니다. 전쟁이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절망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적극 지원한 이원익, 정탁 같은 분들의 힘도 컸습니다. 난중일기라는 생생한 기록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도 이순신 장군도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을 것을 생각하니 장군의 기록 정신이 후세에 귀중한 교본이요, 보물입니다.

전쟁 중에도 매일 빠짐없이 어떻게 난중일기를 쓸 수 있었을까?

난중일기에는 자신이 심한 병마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도 작전 회의와, 전투 훈련, 엄격한 군율, 왜적과의 전투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는 한편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가족 사랑이 흠뻑 담겨 있어 장군의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율곡과 이순신 장군의 공통점은 철저한 자기 관리,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애국심,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 군주를 바른길로 인도한 것이며 그 고뇌와 충정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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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임원진들을 소개했다.
















많은 종인들이 좌정한 가운데


이어 이종기 부회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배기성 역사전문 강사를 소개했다.
경주 배씨 분성공파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 일제강점기사 전공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 2만 여명 보유 (2019815일 현재)

@ 노래하는역사콘서트 (11,200)

@ brandteller4배기성강사 등 (10,140)

저서: E-BOOK 가요가 알려주는 한국근현대사 이야기, 2018, 부크크

대표 강의 : 1. 사도세자와 영조 (69만 조회수)

2. 명량해전, 이순신과 이원익 (46만 조회수)

3. 장희빈과 인현왕후(11만 조회수)

4. 정유와 물류의 제왕 록펠러(23만 조회수)

(유튜브 검색창에 해당 강의를 쓰면, 바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광명문화재단 청백리 오리 이원익 정승 공직자청렴교육 교수 (2015. 4 ~ 현재 총 196회 진행)

현대그룹 C&R 기업교육 사내방송강사 인천상륙작전 과 6.25 (10)(2018. 12 ~ 현재)

숭실대학교 방과후지도사과정 한국사 총 24강 초빙교수

(2018. 9 ~ 2019. 2)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동남아시아지역학 초빙교수

(2018 ~ 현재)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동남아시아 역사 및 지역학 전임교수 (2016 ~ 현재)

IB국제교육컨설팅 대표

()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정책보좌진 역임 (2016)

() 태국방콕국제학교 교사(2007.11 ~ 2011.6)

1. 서론

왜 지금 이 시점에 문성공과 충무공을 롭게되살리는가

2. 본론

1) 기획의도~위기 상황에서의 종친회의 역할을 중심으로

2) 황해도 감사 율곡 이이, 황해도 도사 오리 이원익

3) 니탕개의

4) 만언상소

5) 정병 십만을 양성해야 하옵니다

6) 이순신 통제사를 살려라

7) 명랑에서의 민관군 합동작전

8) 저들을 살려 보낼 수 없소!

3. 결론

1) 문성공 이 이의 리더십

2)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

3) 향후과제 만언봉사의 재조명과 홍보가 절실하다-

 

1583년 병조판서 문성공 율곡 이이 선생은 선조와의 경연(經筵)에서 장차 닥칠 국가의 변란에 대비하여 정병 10만을 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조정이 술렁인다. 실제 조사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 당시 조선군 전체 병력은 육군과 수군을 합쳐 30만 정도였는데, 실제 전투 가능병은 고작 7천여 명이었다. 이 같은 현실은 그보다 9년 전이라고 뭐 더 좋았겠는가! 정병(精兵)이다. 우수하고 강한 정예병을 말한다. 오합지졸 혹은 전투 불가능에 가까운 보급지원 전담병이 아니고, 진짜 칼 잘 쓰고 활 잘 쏘고 말 잘 타고 기동력 우수하고 창 잘 쓰고 백병전에도 능한 그런 병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병사를 10만을 육성하자고? 니탕개의 난을 겪으면서 병조판서가 뭔가 내놓을 줄을 알았지만, 조선의 다른 관리들이 들을 때 이는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었다. 이 같은 병조판서의 주장에 가장 반대한 사람들은 바로 동인세력이다. 참으로 한스럽게도 그 동인세력 중 서애 류성룡이 옹골차게 반대했다. 그렇게 국방력을 키우게 되면 전쟁심리가 팽배해져서 민심이 불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율곡 이이 선생은 류성룡의 반대를 받으면서 너무나 슬퍼하고 통탄해했다. 

또한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도 이와 같은 10만 양병의 주장에 반대했다. 특히 백사의 반대에 대한 율곡 선생의 반응은 너무나 유명해서 현재의 초등학생용 율곡 선생 위인전에도 등장한다. 이보시오 백사,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당신 같은 사람마저 내 의견에 반대하다니, 그럼 도대체 이 나라가 어찌 되겠소!”

많은 사람들이 율곡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이 허구라는 주장을 편다. 그런 의견을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정말 많이 들었다. 율곡 선생을 서인 즉 기호학파의 선구로 보고, 주로 남인 영남학파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남인의 거두가 되는 허균선생, 성호 이익 선생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들의 저서를 보면, 하나같이 그때 율곡 선생이 정병 10만을 양병하자고 했다.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하고 왜란을 예견한 유일한 사람이다.”라며 추모한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일부 학자들의 말대로 허구라면, 이들의 의견도 허구라고 칠 것인가.

정병 10만을 하려면, 예비군은 30만 가까이 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군적(軍籍) 조사가 전국적으로 다시 이루어져서 전국 인구센서스를 실시해야 한다. 이게 반대론자들의 핵심이었다. 니탕개의 난 당시, ‘노비를 양인으로 면천할 것인가 아니면 양인일지라도 강제로 노비로 소급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크게 다투었던 조정에서는 정말 율곡의 의견이 싫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선생은 1574년 황해도감사로 부임하며 이원익을 군관보좌(황해도 도사)로 데려가서 군적부터 깨끗하게 정리한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 조선 군적도 다시 다 정리하자고 한 것이다. 자신과 이원익 두 사람이 다시 뭉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미리 10만 정병을 양성해서 급할 때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여 년 뒤에 나라에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율곡 이이)

무사할 때 왜 군대를 기릅니까

그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서애 류성룡)

그 다음해 율곡이 울화병으로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사와 서애는 모두 율곡의 선견지명을 칭송했다. 그리고 스스로와 나라의 운명을 탄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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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청소년 대학생 층도 참석했다.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를 살려내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임진정유왜란 활약상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그 분은 민족의 성웅(聖雄)이시다.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명량과 노량을 제외하면 모든 전투는 항상 이길 수 밖에 없는 요건을 만들어 놓고, 조선 수군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만들어 놓고 압승을 거두었다. 저항하는 적은 거의 섬멸되었고, 수군 장악지역에 둔전(屯田)을 많이 일궈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목민관으로서의 역할도 거의 완벽하게 해냈으며, 무관임에도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수많은 시조와 함께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국보 제 76호를 기록한 분이시다.

또한 모든 악조건을 본인의 정신력 하나로 극복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조선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린 적이 없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자세로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과 민족과 조선 수군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만고(萬古) 충신(忠臣)의 표상이다. 전쟁터에서 부하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승패보다 더욱 신경을 쓴 사례는 세계 전쟁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운 위민(爲民) 애민(愛民) 리더십의 거의 유일한 본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순신 장군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바보같은 임금 선조의 열등감은 조선의 영웅 이순신에게 모아지는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본인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갔다가 돌아왔다는 열등감은 왜장 고니시로 하여금 이간질 도발을 하게 만들었고, 또 원균으로 하여금 모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서애 류성룡과 오리 이원익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죽이면 안 된다” “남해 바다를 수호할 사람은, 왜군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 뿐이다.”라며 절대로 안 된다고 극간한다. 이에 끝까지 이순신을 변호한 자는 도체찰사 오리 이원익 정승뿐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2차례에 걸쳐 이순신의 수군통제영을 방문하고, 이순신의 위민사상과 애민사상에 큰 감동을 받는다. 군기의 엄격함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공의 충정이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내가 병사들에게 소고기로 큰 파티를 열어주겠습니다.”라며 격려했기에 지금도 통영에서는 오리 이원익 정승이 넘어온 고개를 보고 정승봉이라고 부르며, 그 소고기 파티를 기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원익 도체찰사는 선조나 문무백관들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충무공 이순신을 홀로 변호한다. 좌찬성 정탁을 시켜 이순신 장군 구제청원서를 작성하게 하고 함께 이순신 장군을 절대 죽일 수 없다며, 이 사람은 역적이 아니라고, 임금과 왕실, 그리고 관료집단 전체에 밤새 맞선다. 국문장에서 이 정도로 임금과 다중의 뜻에 반하여 지위는 물론 목숨을 걸고 반대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는 그 예전, 황해도 도사 시절, 황해도 감사로써 자신의 상관이었던 율곡 이이가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처벌하지 않고 믿어주었던 그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일 명량해전을 이기고 난 뒤, 많은 부하 장수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 임금에 대한 섭섭함과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그에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경들의 뜻을 안다. 이 명량해전의 모든 성공은 모두 이원익 정승의 덕분이니라. 그가 한 양의국문장에서 나를 역적이 아니라고 끝까지 믿어주었다. 그리 알라 라며 난중일기에 분명히 적혀 있다. 참으로 위대한 정신력이다.



강연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 차, 서서 강연을 듣는 종인들도 있었다.

결론으로

(1) 문성공 이 이의 리더십

누구보다도 훌륭한 어머니를 가진 율곡은 그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다. 어머니의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훈육으로 13세부터 28살까지 응시한 모든 과거(科擧)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조선이 낳은 최고의 천재는 그게 정도전이냐 정약용이냐 이런 논쟁들이 있지만,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율곡 이이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채 쉰 살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으나, 그 이후에 조선 국왕의 묘소인 종묘와 조선의 지배이념인 유교 주자성리학의 시조인 공자의 묘소인 문묘에 동시에 배향되는 크나큰 영광을 누렸다. 또한 살아서는 정실 부인에게서 자식이 없었으나, 왕명으로 서자를 적자로 변환시켜서 제사를 받들고 집안의 대를 잇게 했다. 즉 봉사손(奉祀孫)을 둔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요렇게만 보면, 그냥 공부 잘하는 천재 하나의 인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했다.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그냥 편하게 살수도 있었고, 소년 등과했으니, 명문가의 사위가 되어 탐관오리로 살수도 있었다. 좋은 머리로 온갖 탐욕을 합법화하는 사례는 조선시대 뿐 아니라 오늘날의 법조계 정계 학계에서도 얼마든지 그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런 사회적 지도층의 타락과 신뢰상실 그리고 탐욕에 우리 서민들은 언제나 희생양이 되고, 또한 사회적 신뢰는 완전히 추락한다.

그런데 문성공 율곡 이이 선생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부었다. 조선 왕조 500년 에 가장 뛰어난 천재가 보는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불쌍했다. 벼슬도 왕실정책자문기관인 홍문관,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야 하는 사간원,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민생을 살펴야 하는 사헌부 등에서 요직을 거치고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그 직분에 정말 충실했다. 말 그대로 정명(正命)사상이다.

백성들은 율곡을 정말 사랑했다. 최고의 천재가 민생을 우선시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데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설인 만언봉사, 어린 양반과 중인 아이들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만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 보는 교육서 격몽요결, 임금과 사대부가 바라보는 사회현실을 냉철하게 꼬집는 동호문답, 마지막 1583년 나라 전체의 국방력 강화와 개혁을 바라며 올린 십만양병 제안서까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탐욕스러운 점은 하나도 없다.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고 더 나아가 청렴과 정직의 리더십으로 조선을 사랑하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키가 너무 작아서 관료사회에서 배제되던, 오리 이원익을 당파(동인계)를 떠나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자기가 황해도 감사 시절, 보좌관으로 데려가서 황해도 군적을 모두 정리하고, 해주향약을 시행하는 토대를 만든다. 후일 이원익이 실시하는 상품작물 재배나 상단지원 그리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대공수미법의 시행, 혹은 요역의 육번제 등은 모두 율곡의 가르침과 정책적 교류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위대한 리더십, 즉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을 위하며, 파벌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한 그런 놀라운 천재형 관료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2)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


오리 이원익 정승은 과거 자신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을 믿어주고 성원해준 율곡 선생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았다. 그가 말해준 위민사상과 안민사상 그리고 애민사상도 결코 잊지 않았다. 청렴결백한 그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과 동시에 국가비상대책 위원장인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그 한스러운 42년 정승 생활을 시작한다. 한민족 최악의 위기 중 하나였던 임진정유왜란에서 그는 바깥사돈(이원익의 서녀와 이순신의 서자가 혼인했음) 이순신 수군절도사의 작전을 돕고, 서애 류성룡(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절친한 친구)과 함께 항상 든든한 지원군으로 활동한다. 이순신 장군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그는 남해 바다를 지킬 장수는 오직 이순신 장군 뿐이라며, 끝까지 민족의 성웅을 지켜낸다.

니탕개의 난 때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직접 뽑아 보낸 5인의 장수 중 한 명으로 실전을 치렀고, 이때부터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는 바른 소리를 많이 냈다. 그는 오로지 안민 애민 위민의 사상으로 조선 수군 병사들의 목숨도 귀하게 여기는 참으로 보기 드문 지휘관이었다. 그를 이조판서로써 인사권을 발동해 수군 제독으로 임명한 것이 오리 이원익 정승이고, 또한 전시에는 도체찰사로서 정승봉의 전설을 만들어 낼 정도로 조선 수군을 든든하게 도왔다. 명량해전에서의 민관군 합동작전의 대성공은 율곡-오리-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다져놓은 백성들의 조선 사회에 대한 신뢰가 결실을 맺은 한반도 전쟁 사상 가장 큰 영광이요 대승이었던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본인보다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생각할 정도였고, 노량 전투 중에는 본인이 죽을 수도 있는 위급함에도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에 꼭 안 그래도 되는데 직접 가서 구출할 정도로 인격이 위대한 분이셨다. 왜군에 대해서는 한치의 용서나 양보도 없었다. 그 아들 이면도 매우 훌륭해서, 이순신을 잡기 위해 왜군들이 아산 본가를 쳐들어 갔을 때에도 항복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그 죽음의 소식에도 자기 휘하의 병사들이 동요할까봐 무려 4일 동안이나 슬픈 내색을 안한다. 왜냐하면, 수군들도 거의 자기의 형제자매 부모 친구 아내 등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 요즘의 공직자들이나 기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행태를 볼 때, 우리 민족에 진짜 이런 분이 존재했었는가. 소설 아닌가 할 정도로 위대하다.

오늘날 일본 아베 총리와 자민당 그리고 연립여당 공명당에 의한 비열한 무역보복 조치에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것이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 아닌가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많이 보인다. 심지어 일본 편을 들면서 우리가 어차피 질 텐데 그냥 굴복하고 조용조용하게 살자는 식의 친일적 사고방식마저도 보인다. 언제나 상무 정신을 강조했던 문성공 율곡 이이 선생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만이 오늘날의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가장 큰 위기를 극복하는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 시간 반의 열강에 종인들은 박수로 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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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 종보 제130호 12면 증면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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